나는 기록보다 구조로 생각해온 사람이다

by Poroom

한동안은 메모와 기록을 멀리했다. 적는 순간 내 생각이 고정되는 느낌도 싫었고, 그걸 누군가 들여다볼 수 있다는 감각은 더 싫었다. 기록은 정리의 도구라기보다, 내 안을 꺼내 놓는 방식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오래 피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록을 싫어하는 것과, 생각을 정리하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머릿속에는 늘 질문이 많았고, 궁금한 건 계속 생겼다. 적지는 않았지만, 대신 다른 방식으로 정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순서를 바꿔보고, 관계를 묶어보고, 흐름을 다시 세우는 식으로. 지금 돌아보면 나는 기록보다 구조를 만드는 쪽에 더 가까웠다.


나는 생각의 확장이 빠른 편이다. 하나를 보면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바로 다음 질문과 연결이 떠오르고 그다음 가지까지 한꺼번에 뻗어나간다. 문제는 그 속도를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전달할 수는 없다는 데 있다. 내가 머릿속에서 몇 단계를 건너뛰며 도착한 결론도, 상대에게는 그 중간 순서를 하나씩 설명하지 않으면 이해되기 어렵다. 그래서 내 생각을 전달하려면 언제나 순서를 만들어야 했다.


내 생각의 원래 형태는 사실 순서형에 가깝지 않다. 먼저 전체를 한 번에 보고, 그다음에 필요한 설명을 붙이는 쪽에 더 가깝다. 그림을 그릴 때도 스토리 만화처럼 시간 순서대로 풀어가는 형식보다, 한 장의 이미지 안에 관계와 분위기와 설명이 한꺼번에 들어가 있는 쪽이 더 자연스러웠다. 아마 생각이 움직이는 방식도 비슷했던 것 같다.


그래서 더 일찍부터 구조를 만드는 쪽으로 갔던 것 같다. PPT를 만들고, 플로우를 정리하고, 말의 순서를 다시 세우는 일이 내게는 선택이 아니라 필요에 가까웠다. 머릿속에서 너무 빠르게 확장되는 생각을 다른 사람이 따라올 수 있는 속도로 바꾸려면, 결국 중간 다리를 계속 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기록은 내 생각을 남기는 방식이었고, 구조는 내 생각을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실무에서도 그 차이는 자주 드러났다. 혼자 생각할 때는 흩어진 정보들이 어느 순간 한 장면처럼 연결됐지만, 회의에서 그걸 그대로 말하면 대부분은 따라오기 어려워했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표를 만들고, 단계별 흐름을 그리고, 누가 먼저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지 순서를 나눴다. 누군가는 그걸 정리라고 불렀지만, 내게는 번역에 더 가까웠다. 머릿속의 확장을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속도로 바꾸는 작업이었다.


그 과정이 늘 매끄러웠던 건 아니다. 급하게 설명하다 보면 말을 더듬기도 했고, 머릿속에선 이미 다음 단계로 넘어갔는데 입은 아직 앞 문장에 머물러 있어서 답답할 때도 많았다. 그래도 설명해야 했다. 일을 하려면, 결국 사람을 설득하고 이해시켜야 했으니까. 지금 돌아보면 나는 잘 말하는 사람이 되려고 했다기보다, 살아남기 위해 설명하는 사람이 된 쪽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어떻게 보면 기획이라는 일도 그 연장선에 있다.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적어두는 것보다, 흩어져 있는 것들 사이의 연결을 보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다시 배열하는 일이 내게는 훨씬 자연스러웠다. 메모를 잘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대신 구조를 만드는 일에는 오래 머물 수 있었다. 그건 단순한 취향이라기보다, 내가 세상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과 연결되는 방식에 가까웠다.


예전에는 기록을 잘 못한다는 사실만 붙잡고 스스로를 부족하게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나는 기록에 약한 사람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정리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손으로 꾹꾹 눌러 적는 방식은 여전히 불편하지만, 구조를 만들고 흐름을 정리하는 방식은 오히려 내게 가장 익숙하다.


결국 중요한 건 무엇으로 정리하느냐보다, 어떤 방식이 나한테 맞느냐에 더 가까웠다. 누군가는 기록으로 생각을 붙잡고, 누군가는 말로 정리하고, 누군가는 구조를 만들면서 이해한다. 나는 아마 마지막 쪽에 더 가까운 사람이다. 문제는 내가 기록을 못해서가 아니라, 기록만을 정리의 표준처럼 보는 기준 안에서 오래 스스로를 판단해왔다는 데 있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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