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저녁부터 추적추적 내린 비는 오늘 집을 나설 때까지 외근에 대한 설렘을 신발 젖은 느낌으로 만들었다. 다행히도 날씨는 쾌청했고 이런 날에 사무실을 탈출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들썩였다. 약 한 시간 거리를 지하철을 타고 가는 길은 책을 읽거나 드라마를 보자며 계획을 세웠다. 전제는 앉을 수 있다면이었지만 출근 시간을 비껴간 평일 오전. 지하철은 비어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경의중앙선에 대한 경험치가 부족했다. 빈자리는 없었고 북적이는 칸도 있었다.
조금 한산한 쪽으로 가서 좌석 앞쪽에 서서 음악을 들었다. 졸음이 밀려와 눈을 감았다가 살짝 정신이 들면 창밖을 봤다. 손잡이를 부여잡은 팔에 체중을 실어서 잠들려고 노력했다. 주변에서 인기척이 느껴지고,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면 그때야 정신을 차렸지만 비어있던 자리는 순식간에 채워졌고 계속 서서 갔다. 찰나의 순간을 놓치면 기회는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은 대중교통 자리에서도 알 수 있다. 내 앞에는 대학생, 노인, 대학생 이렇게 세 명이 앉아 있었다. 서서 자다가 손에 힘이 풀리고, 근데 때마침 열차가 급정차를 하게 되어 넘어지면 너무 창피할 것 같아서 깨어 있기로 했다.
어두운 창을 거울 삼아 뒤에 앉은 사람들을 잠깐 살피다가 내 얼굴을 뜯어봤다. 이내 한강을 지나기 위해 지하철이 터널 밖으로 나올 무렵, 필터를 입힌 듯한 뽀얀 하늘색에 솜 같은 구름들이 보였다. 조금 멀리 떨어진 한강은 빛을 받아 깨끗한 물처럼 보였다. 멍하니 바라보면서 언젠간 미래엔 이 하늘도 자동차들로 채워지겠지, 100세 시대에 사람들은 누구나 세네 번 이상 직업을 바꾼다는데 나의 이후 직업은 어떻게 될 것인지 이번에야말로 문과 탈출을 할 수 있을 것인지 코딩을 알아볼까, 생각을 보글보글 터뜨렸다.
하늘에 거뭇한 것들이 나타났다. 멀리 있어서 어떤 새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이름 모를 새들의 허우적거리는 날갯짓은 여유롭기보다는 다급해 보였다. 열 마리 내외로 보이는데 그 안에서도 네 마리, 세 마리 이런 식으로 그룹을 나눈 것 같았다. 나중에 새랑 자동차랑 부딪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마지막 생각이 터뜨려질 무렵이었다.
앞에 앉은 노인이 누군가에게 손짓하더니 다른 노인이 와서 그 자리를 채웠다. 들고 나는 자리에 눈길이 갔다. 먼저 앉아있던 노인은 내게 한 마디를 내뱉고 지나갔다.
“젊으니까 서서 가.”
대꾸할 겨를도 없었다. 하지만 스멀스멀 안 좋은 감정이 퍼져갔다. 여유가 있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감정을 마음의 컵에 쏟았다. ‘나름 논리적’이라는 얼음을 쏟은 다음 빨대를 넣어 휘휘 저었다.
‘아, 인터넷 글에서만 봤던 게 이런 상황이구나. 진짜였어.’
‘근데 난 왜 기분이 나쁜 거지? 자리를 뺏겨서?’
‘아냐, 그건 아냐, 내 자리도 아닌데. 관행적으로라면 바로 앞에 서있는 내가 앉으면 좋긴 하지만 기분 나쁠 상황은 아니었어.’
‘내가 너무 앉고 싶어 보여서 말한 건가. 그래도 그렇지 왜 이렇게 끓어오르려고 하는 거지?’
‘글쎄, 나한테 반말해서...?’
감정의 원인이 정리되자마자 장면 상상이 시작되었다. 격정적인 내가 주인공이 되어 뒤를 쏘아보고 한 마디 한다.
‘저한테 왜 반말하세요?’
이건 아닌 것 같다, 이건 거의 눈 돌아갔을 때의 행동 같다. 다음 상상. 나도 똑같이 반말로 받아치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본다. 이번엔 혼잣말 인척 하되 다 들리게.
‘왜 반말하지?’
아, 지지리 궁상. 어린애냐. 감정 표현에도 타이밍이 중요한데, 너무 우려 식은 차가 떫어지듯, 멋없다. 약자를 상대로-등산 복장이 아니었다- 이러는 거 아니야. 대답하지 못하고 지나친 상황에 대한 쉐도우 복싱을 끝냈다. 그 장소에 계속 있는 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아서 문쪽으로 떨어졌다.
열차는 내내 지상을 달렸고 기차를 탄 것처럼 밖을 구경했다. 어느 순간 뒤에서 엄청 큰 소리가 났다. 싸움이 났나 싶어 고개를 돌리자 지하철 이동판매상인이 내 뒤에 자리를 잡고 큰 소리로 물건 소개를 하고 있었다. 겨울에 쓰면 좋을 신발 깔창이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음악을 들었다. 음악과 상인의 목소리가 섞여서 들렸다. 원가는 얼마일까, 상인은 월급제일까 성과제일까 등등 생각이 또다시 풍경을 도화지 삼아 퍼져나간다. 순간의 관심과 무관심이 교차하는 지점이 지하철에 있었다. 모두가 미어캣처럼 반응하지만 이내 고개를 숙이고 주가 확인, 게임, 동영상 시청, 다른 사람과의 대화에 열중한다. 그리고 나 역시 거미가 거미줄 뽑아내듯이 내 생각을 하염없이 뽑아냈다 걷어냈다를 반복했다. 백색소음으로 가득하지만 각자만의 생각과 감정으로 미어터질 것 같다.
맑은 햇빛을 오롯이 받는 건 좋았지만 사무실에 있을 때와 다름없이 시끌사끌한 마음.
컵 안에 있는 것들을 모두 지하철에 쏟아버리고 내렸다. 에효. 미팅이나 잘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