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레인지용 찜기를 이용해서 고구마를 찐다. 그리고 조금씩 소분해서 냉동실에 넣어 둔다. 퇴근 후 집에 와서 저녁밥 대신 두세 개씩 해동해서 먹는다. 자취 시작 이후 소량의 음식물 쓰레기와 초파리 등 음식을 해 먹는 일보다 뒷정리가 더 번거롭다는 만고의 진리를 몸소 깨닫고 귀차니즘의 끝을 향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안 먹자니 힘 빠지고 먹자니 뒤처리가 귀찮고 답을 찾아 헤매며 떠돌던 나날. 심심한 마음에 집(=본가)에 가서 뒹굴거리다가 소쿠리에 담긴 찐 고구마를 먹었다. 껍질을 벗기는 것도 귀찮아서 껍질째 먹다가 이거다 싶었다.
며칠 뒤 고구마 한 박스를 시키고 찜기도 샀다. 4개씩 10분 돌리면 딱이다. 껍질째 먹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음식물 쓰레기도 없고 설거지 거리도 대폭 줄어든다. 다이어트 식품으로도 많이 먹는다 하니 고구마야말로 일석 삼조의 자취생 완전 음식이었다. 점심도 고구마, 저녁도 고구마로 먹었다. 다이어트가 목적이 아니었기에 두세 개가 세네 개가 되고 순식간에 사라져 한 박스가 사흘이 되지 않은 채 동이 났다.
이후 세 박스를 들였다. 호박 고구마 1박스와 밤고구마 2박스. 하나만 먹으면 질리니까 섞어먹어 보자는 마음이었지만 호박고구마의 부드러움보단 퍽퍽한 밤고구마가 좋다. 지금 현관 바로 앞에는 고구마 네 박스가 차곡차곡 쌓여있다. 오랜만에 놀러 온 언니는 이를 보고 고구마에 한이 맺혔냐고 했지만 상관없다. 밤고구마 두 개를 연달아 먹고 물을 들이켜면 그야말로 후련하다.
이런 내 고구마 예찬론을 들은 지인은 후련함을 위해 퍽퍽함을 견디는 모습이 약간은 사디즘 기질이 있는 거 아니냐며 물었지만 상관없다. 그렇게 고구마로 몇 주를 보내자 조금은 새로운 맛이 필요했다. 탕비실에 남아돌던 온갖 소스를 주워다가 찍어 먹어봤다.
갈릭 디핑소스의 부드러움과 고구마의 부드러움이 섞여 느끼함이 배가되었다. 칠리소스나 짭조름한 가루는 좋았다. 핫소스도 괜찮다. 나중엔 몇 가지 소스를 사서 비교를 해봤는데 제일 괜찮았던 것은 시판 양념치킨 소스였다. 매운 걸 못 먹는다면 간장맛 양념치킨 소스가 최고다. 튜닝의 끝에 순정이 있다는 말처럼 소스, 가루를 다 찍어 먹다가 결론은 고구마와 물로 정착했다. 우유도 김치도 다 필요 없다. 그냥 고구마와 물 그 자체로 가 환상의 짝꿍이다.
해동할 때는 조금 바싹 돌려서 군고구마 느낌이 나게 만들 수도 있다. 오래 조리할수록 꼬다리 부분부터 딱딱해지는데 이 딱딱해진 부분을 아무 생각 없이 어금니로 씹는 것도 재미있다. 씹는 행위에 열중하면서 은은하게 느껴지는 고구마의 맛. 개껌이 괜히 딱딱한 게 아니야.라고 하면서 개껌이 개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볼 수 있다.
평소처럼 그릇에 고구마를 두 개를 올리고 전자레인지에 해동했다. 평소에는 냉동하고 하루 이틀이면 다 먹었지만 이때는 회식이다 저녁 약속이다 해서 냉동실에 오래 있었다. 냉동 기간이 길기 때문에 8분 정도 돌리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8분에 설정을 맞추고 밀린 설거지를 할 무렵 약간의 단내가 돌았다. 흥얼거리면서 전자레인지를 보는데 전자레인지 문틈 사이로 연기가 올라왔다. 철렁했다. 먼저 전기 코드를 뽑고 전자레인지를 열자 솜뭉치 같은 연기 덩어리가 나왔다. 작은 고구마가 하나의 심지가 된 듯 고구마는 담배 피우는 사람처럼 연기를 연거푸 뱉어냈다. 장갑을 끼고 그릇을 들어서 그대로 싱크대로 냅다 던지고 차가운 물을 들이부었다. 연기 덩어리가 빠지자 전자레인지 안에서 더 이상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았고 연기를 뱉어내는 고구마는 물에 빠져있다. 다급했지만 신속한 처치에 사건 무사 해결! 이런 정리된 마음으로 뒤를 돌아봤다.
‘헉’
방안이 모두 연기로 가득했다. 안경 렌즈가 더러워서가 아니라 정말 시야가 뿌옇게 보였다. 전자레인지에서 빠진 연기가 방안에 정체된 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일단은 한 번도 제대로 쓴 적 없는 주방 환풍기를 돌렸다. 창문, 화장실 창문, 걸쇠를 건 채로 현관문까지 열어젖혔다. 선풍기도 돌렸다. 불이 났을 때 왜 몸을 숙이라고 했는지도 다시 한번 알게 되었다. 연기는 위쪽에 그득했다.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싶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싱크대에 던진 고구마를 다시 한번 봤다. 혹시나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새까만, 과거 고구마의 모습을 띠던 그것은 3분이 8분으로 늘어났을 때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라며 힐난하는 것 같았다. 체념하는 마음으로 음식물쓰레기봉투에 넣어 냉동실에 넣었다.
연기가 대충 다 빠지고 나서, 전자레인지에 다시 고구마를 데웠다. 이제는 욕심부리지 않고 3분만 돌렸다. 고구마 탄내가 가득한 방에서 고구마 두 개를 먹으며 과욕은 불러오는 참사에 대해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출근 준비를 마치고 스카프를 둘렀다.
‘킁킁. 이상하다 고기 냄새가 날 리가 없는데.’
외투를 마저 걸쳤다. 고구마 탄내가 행거에 걸려있는 옷 틈으로 다 들어왔나 보다. 이런.
아침잠이 많아 항상 시간에 쫓기기에 바쁜데 오늘은 탄 고구마 향을 맡으며 서둘러 현관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