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점인지 알 수 없지만 나름 할 말은 하고 사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부당한 지시에 웃으며 미꾸라지처럼 빠져나오는 능력이랄까. 처음 회사에 들어갔을 때 몇 년 간은 윗사람의 말을 하나의 인생 기준인 양 받아들이며 살았다. 거절은 곧 능력의 한계치를 드러내는 일이라고 여겼다. 업무 분배 과정에서 다른 사람에게 업무가 넘어가면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건만 ‘넌 이건 할 수 없는, 고작 그것밖에 안 되는 인간이야.’라는 말을 마음속에 아로새겼다. 그러다가 문득 선임과 동기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업무를 거절하고도 나보다 능력 있다 인정받고,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무렵 가슴을 파내던 조각칼에서 손을 내려놓게 되었다.
거울을 보면 다른 어디보다도 턱살이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오는 나이가 되고 나서야 노를 외치는 것이 내게 숨통을 트여주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노를 외치는 것에 주춤하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예전처럼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진 않는다. 회사에서 내가 하는 것을 제대로 평가해주지는 않고 설사 그 평가가 정확하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회사라는 것에 크게 기대가 없기 때문이다. 나름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면역력이 없는 부분이 있다.
있는 감정 없는 감정 그러모아
‘입 벌리고 있어 감정 들어간다!’
감정쓰레기통 취급은 아직도 면역체계가 발달하지 않은 부분이다. 한번 이야기를 들어주기 시작하니까 시도 때도 없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본인이 말하고 싶을 때마다 연락을 한다. 초반에는 통제 불가능한 사건에 대한 분노와 같은 매운 느낌의 감정들로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종종 하소연으로 포장되는 우울감과 침울한 감정들을 나라는 쓰레기통에 아낌없이 털어 넣는다.
받아들이는 입장에선 타인과 유대감이 형성되었다는 점과 이런 이야기까지 나한테 하는구나 하는 묘한 보람으로 네 일을 내 일처럼 받아들이지만 나중에는 진절머리가 날 정도이다. 우는 아이에겐 젖을 먹이거나 기저귀를 갈아주거나 달래주면 그치지만 감정을 쏟아내는 사람은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끊임없이 말하기 위한 감정을 재생산해내는, 태양에너지와 같은 무한 동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나 역시 어디서 이런 여지를 줬는지 모르겠지만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전화로 1시간 이상 쏟아내는 사람 2명, 한 달에 한 번 이상 쏟아내는 사람 1명, 그리고 잊을만하면 전화하는 사람 1명으로 총 4명의 감정을 소각하고 있다. 카카오톡으로 대화를 시작하다가 갑자기 ‘지금 잠깐 통화 가능해?’라는 메시지가 오면 일단은 간식을 최대한 손 가까이에 둔다. 그리고 심호흡을 반복해서 하고 그리고 최대한 활기차게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이런 사람들에게 자제해달라는 말도 소용이 없는 게 본인은 감정을 쏟아내는 것 자체를 모른다. ‘나는 그냥 있었던 일을 설명하는 건데 왜 그걸 자제하라고 하는 거야?’라며 방금 전까지 눈물을 글썽이던 이가 한순간에 숨겨져 있던 가시를 세우며 전면전을 준비한다. 그럼 또다시 헤어 나올 수 없는 감정싸움에 굴레에 빠지고 마지막에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사과문을 읽는 것으로 막이 내려진다.
이렇게 되면 감정쓰레기통 역할은 다시 만들어지고 그날 밤은 어차피 상황이 변하지 않을 거면 상대 기분 나쁘지 않게 만들걸과 억지사과에 스크래치 입은 자존심으로 밤잠을 설친다. 완전 초반에는 상대와 연을 끊는 방법도 사용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런 방법이 언젠간 나에게 부메랑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 적을 두지 말라는 어른들의 조언으로 최대한 사용하지 않으려고 한다. 예스를 외치던 내가 노를 외칠 수 있던 것.
에효. 10월 말에 내가 사는 동네로 놀러 온다는 친구야.
너는 말을 하렴 나는 폭식을 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