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 달 앓이

왜 하필 고양이야?

우울증과 6개월을 싸우고 장렬히 전사했다. 회사를 관뒀다. 퇴사할 무렵 병과 체중 외에 내게 남은 건 없었다. 아직 서울시가 인정하는 청년이라, 청년수당이라는 월 50만 원의 위로를 받으며 근근이 생활했다. 중소기업청년전세대출을 받아 관리비 5만 원과 대출이자 약 5만 원을 제하면 그럭저럭 조금은 버티지 않을 수 있을까하는 계산을 몇 번을 두드린 후에야 회사를 박차고 나올 수 있었다.


퇴사 후 나는 전업작가, 안고 있던 꿈을 드디어 펼쳐놓았다. 멋진 비단 보자기를 꿈꾸며 펼쳤건만 눈앞에 보인 건 구멍이 숭숭 나고 보풀이 가득 일어난 싸구려 담요였다. 그랬다. 내 실력이. 언제나 초반에는 열정적이다 못해 활활 타오르지 않는가. 질적 승부가 불가능하다면 양적으로, 인해전술 못지않는 문해전술을 펼쳐볼 생각으로 열심히 손을 놀렸다. 지금까지 한글 파일만 열심히 아메바처럼 재상산되고 있다.


그렇게 6월부터 9월 말까지를 치열하게 혼자서 보냈다. 문제는 10월에 터졌다. 2020년 10월 한 달은 내게 최악의 한 달이었다. 왜 하필 10월이었는지, 퇴사 후 4개월이 된 시점에서 난 무척 힘든 상황을 보냈다. 그 당시의 난 세 갈래로 쪼개져 있었다. 하나의 마음은 부단히 움직였다.


‘빨리 글을 써! 김크루아상 뭐 하는 거야! 글을 쓰라고!’

두 번째 마음은 첫 번째보다 조금 미적거리고 자기학대적이었다.

‘아, 난 아무것도 못하겠어. 난 인간쓰레기야. 폐기물이라고, 밥 먹고 똥만 생산해내고 각종 자원을 소비하기만 하는 쓸모없는 존재.’


여기까지만도 무난하다. 나는 평소에도 자신을 비하하는 습관이 있었으니까. 문제는 마지막 녀석이었다.

마음의 한 구석에 행감을 치고 있는 이 녀석은 상당히 무겁게 날 압박했다. 내가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었다. 하고 싶은데 손가락 까딱할 수 없는 상황이 연속되었다. 옛날 세대는 알지 모르겠는데 날아라 슈퍼보드 1화에서 손오공이 깔려 있는 모습. 딱 그게 나였다. 내 몸인데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있어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고 머리는 목 위의 돌멩이에 불과했다. 간헐적으로 뭔가 튀었지만 그것은 오로지 생존을 위한, ‘배고프다. 졸립다. 자고 싶어.’ 메시지에 불과했다. 우울증 약을 최근에 줄였던 나는, 이것이 과도기라고 생각했다.


‘조금만 견디면 나아지겠지?’

‘나도 조금씩 약을 줄여야지.’

‘아냐, 그래도 다시 병원에 가볼까?’

‘됐어. 이제 2주 남았는데.’


한 달 만에 병원에 갔을 때 살려달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제발 부탁이니 약을 다시 추가해달라고 했다. 나의 상황을 듣던 의사쌤은 친절하게도 약을 추가하고 바꿔줬다. 일관되게 예민한 난 약에도 예민했다. 4주 텀은 너무 기니 다음번엔 2주 뒤에 오기로 약속하고 병원을 나왔다.


집에 돌아와 약을 먹고 세 시간이 지났을 때서야 비로소 나는 의지를 되찾은, 눅눅한 크루아상이 아닌 바삭하고 겹겹이 쌓인 크루아상으로 돌아왔다. 그때의 행복감은 말로 할 수 없다. 지금도 당시의 기분 전환을 생각하면 방 안에서 혼자 점프를 하면서 얏호 소리를 낼 수 있을 정도다. 나를 꺼내 준 삼장법사는 모 제약사의 알약이었다.


아직까지 고양이 이야기가 나오지 않으니, 이 빵 같은 사람은 자기 한탄이나 할 생각인가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비로소 제정신을 찾은 난 나에 대해 다시금 고민했다. 물론 그전에 나의 습관, 포탈에 약 검색을 놓치지 않았다. 누군가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꽃이 된 것처럼, 나도 내 약을 봤을 때 비로소 나의 질환의 이름을 찾았다.


‘효능 효과 : 조증·조울증의 치료 및 예방적 유지치료’

“그래. 난 조울증이었어!”

그야말로 상쾌한 결론이었다. 내 증상에 대해 첨언하자면 우울증을 바탕으로 종종 이상한 전능감이 있다. 내가 내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들뜨고 신나며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샘솟는다. 이때 속사포처럼 말을 하는데 입은 머리를 따라가지 못해 대부분을 점프 점프하여 듣는 이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있고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유독 힘이 들어가 있을 때는, '조'의 상태에서는 끝없이 하늘을 향해 오르는 이카로스 같다. 그러다가 밀랍이 모두 녹아버렸을 때, 조의 상태가 끝나고 울의 상태로 갈 때의 낙폭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롭다. 이카로스가 떨어졌을 때 그의 몸의 고통뿐만 아니라 실망감도 빼놓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바로 글을 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한 번 손이 굳으니 글 쓸 자신이 많이 사라졌다. 그래서 다시 나는 습관적으로 나 자신에 대해 천착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불현듯 생각이 떠올랐다.


‘고양이! 난 고양이를 키우고 싶어!’

이유는 없다. 오늘 점심에 짜장면이 당기는 것처럼, 재수 없는 부장 새끼가 갑자기 나한테 지랄을 하는 것처럼 그것은 예고 없이 찾아온 생각이었다. 여기서 바로 고양이를 입양했다면 나는 박제당하고 두고두고 비난을 받아도 될 사람이다. 다행히 나는 생각의 꼬리물기와 가정법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지만 타인의 시선을 자가 검열한다. 게다가 나의 폭주를 막아주는 우리 가족들이 있다. 그렇게 생각에 생각이 거듭되었다.


키워야 할 이유와 키우지 말아야 할 이유가 모든 것을 뚫는 창과 모든 것을 막는 방패처럼 끊임없이 싸웠다. 지금 돌이켜보면 약간 불순한 의도도 있었다. 작가들의 대부분은 고양이와 함께 지낸다. 많은 작가들의 뮤즈로 고양이가 언급된다. 어슐러 르 귄도 턱시도를 멋지게 입은 고양이 파드와 함께 보낸 일화를 에세이에 가득 담지 않았는가. 작가는 아니지만, 내게도 고양이가 있으면 행운을 부른다는 '마네키네코'처럼 작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후쿠를 들이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옛날 사진과 기록을 정리하던 중에 미처 놓쳤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 클라우드에는 길고양이 사진이 생각보다 많았던 것과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고 일기도 종종 끄적였다. 나의 과거부터 고양이를 향한 켜켜이 쌓인 욕망이 터져나온 건 아닌지, 돌이켜 생각해 본다. 과거 기록을 보고나서야 거북한 동기에 면죄부를 주었다.

IMG_4308.jpg
IMG_4866.jpg
IMG_4444.jpg
IMG_2279.jpg
IMG_2234.jpg
IMG_0622.heic
IMG_0625.heic
찍은 길냥이 사진 중 일부만 추린 것



키우고 싶지만 실행력과 결단력이 부족한 나는 고양이 카페에 가입해서 하루의 많은 시간을 보냈다. 고양이 사진과 소식들을 접했고, 고양이가 없어 참여가 불가능한 체험단 글도 열독했다. 10월 말, 11월 초. 검은 상자 안에 갇혀 있다가 나온 지 한 달, 불완전한 내 모습을 오롯이 겨우 되찾았아서 다시 출발선에 섰을 때 내게 불현듯 내게 한 게시판이 눈에 들어왔다.

‘임시보호, 탁묘 게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