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와 놀 때 짧고 굵게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후쿠는 계속 놀고 싶은 캣초딩이다. 무릎에서 폴짝 뛰어내린 후쿠가 바닥에 아주 단정한 자세로 앉아 나를 올려다보며 운다. 놀아달라고.
그럼 손에 잡히는 장난감 하나를 꺼내서 앞에서 마구잡이로 흔든다. 그렇게 1시간, 2시간, 어쩔 땐 3시간도 흘러간 적도 있다. 놀다가 후쿠는 몸을 돌려 밥을 먹으러 간다. 게임 같기도 하다. 게임 오버가 되기 직전에 치료를 받고 원기를 회복한 캐릭터처럼 보인다. 다시 시작이다.
후쿠와 신나게 놀다가도 갑자기 기분이 처진다. 가끔 호흡이 가빠지거나 가슴이 두방망이질 친다. 이유는 모른다. 비상약을 먹으며 몽롱하고 반쯤 졸린 상태가 되길 기다린다. 포기를 모르는 캣초딩을 향한 깃털 장난감은 유유히 허공을 맴돈다.
백수 생활이 길어지면 마음이 늘어지기 쉽다. 생활패턴은 엉망이 되고 동시에 건강도 망가지기 십상이다. 서른이 넘은 퇴사는 단순히 쉬는 걸 넘어 내게 또 다른 기회이자 도전이었다. 도전이어야만 했다. 그랬기에 잊을만하면 다짐하고 한글 프로그램에 같은 말을 반복해서 썼다.
‘스스로를 백수라 여기지 말자.’
‘나는 백수가 아니다.’
‘나는 쉬는 사람이 아니다. 열심히 준비하는 사람일 뿐이다.’
홀연히 목 늘어진 티셔츠처럼 아무리 다잡아도 몸과 마음은 여유를 부린다. 이렇게 의지력이 약한 사람인가 싶을 정도다. 알랭 드 보통의 책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박탈당했을 때 비로소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데 중요한 건 그 감정을 박탈당하지 않을 때도 교훈으로 삼아야 된다.
나에게 적용하자면 회사원 시절, 도보로 다니는 이른 아침 울면서 출근했다. 오전 9시의 경의선 숲길은 상쾌하고 울면서 걸어가기에 최적의 장소다. 일을 하다가도 울컥할 때가 많았다. 자리에서 삭이려고 노력하면 눈물 대신 콧물이 나왔다. 도저히 못 참겠으면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앉아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런 식으로 인생을 보내고 싶지 않아서, 낮에 글을 쓸 수 없는 게 그렇게 한탄스러웠고 서러웠다. 맑은 하늘을 올려다볼 땐 씁쓸했다. 시간이 주어진다면 정말 열심히 글을 쓰겠다고 되뇌었다. 고대하던 시간적 여유가 생겼을 때 초반은 몸을 혹사시키며 달렸다. 아무런 결과도 나오지 않자 낙담하며 땅굴을 팠다. 꼿꼿했던 의지는 흐느적거렸다. 교훈은 그렇게 사라졌다.
고양이를 들이고 나서, 하루의 일정 부분은 고양이를 상대해야 한다. 놀아주는 시간 자체는 즐겁지만 가끔은 정말 글에 몰입했을 때도 의자에서 일어나야 한다. 한 손에는 쥐돌이 다른 손에는 카샤카샤를 흔든다. 그나마 다행인 건 회사처럼 하루 8시간, 12시간이 아닌, 길어야 3시간이란 점이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교감한다. 게다가 우리 고양이는 내가 자지 않으면 절대 자지 않는다. 캣타워에서 선잠을 자면서 30분에 한 번 깨는 한이 있어도 내가 침대에 누울 때까지 기다린다. 가끔은 키보드 위에서 자리를 잡는다. 나는 알랭 드 보통이 책에서 언급한 교훈을 되찾는다. 이제 밤을 새울 수 없고 무한정 글에만 오롯이 쓸 수 있는 시간은 사라졌다. 작은 박탈이 생겼다.
우울증은 단순히 암울한 것뿐만 아니다. 노력해도 집중할 수 없고, 의지를 되찾으려고 발버둥을 쳐도 끈 떨어진 연처럼 닿을 수 없다. 그러나 고양이를 만난 후 조금씩 달라졌다. 놀아줄 때 최선을 다하고 또 그만큼 교훈을 얻고 글을 쓸 때 집중한다. 고양이 카페나 쿠팡, 블로그 접속도 최대한 자제한다. 놀 때 놀고 쓸 때는 확실하게 쓰고. 고양이를 들이고 나서 조금은 더 타이트하게 시간을 관리하고 있다.
목 늘어난 후줄근한 티셔츠에 누군가 고무줄을 덧대줬다.
누굴까?
그건 아마 우리 후쿠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