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동감에서 시작합니다.
139.
어느덧 큰 뚜루뚜가 네 살이 되었습니다.
유치원 원복인 자킷을 입고 집을 나설 때면 제법 그럴싸합니다.
나는 큰 뚜루뚜에게 기본적인 규칙을 가르칩니다.
전통적으로 그것은 아비의 역할입니다.
무엇보다 원인과 결과를 아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찬찬히 설명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방적인 명령으로 무언가를 강요한다면 누구라도 거부감을 느낍니다.
강압적인 방식은 더 큰 저항을 불러옵니다.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를 이해한다면,
규칙을 받아들이기가 조금은 더 수월해질 것입니다.
나는 뚜루뚜뚜루뚜의 눈높이에 맞춰 하나하나 설명하려고 애씁니다.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말을 듣습니다.
하지만 훈육에는 설득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때로 아비는 아이에게 제재를 가하는 역할을 떠맡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재라는 것은 마치 공격과 수비 같은 면이 있습니다.
거기엔 무언가로 찌르는 쪽과 그 찌름을 감당해야 하는 쪽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속성을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하면서 훈육을 해나가야 합니다.
아비가 날카로운 말로 아이를 다그치면
그 말은 아이의 깊은 곳에 생채기를 남기게 됩니다.
나는 이따금 뚜루뚜뚜루뚜에게서 내 말이 남긴 선홍빛 상처 같은 것을 보곤 합니다.
그럴 때면 나는 너무나 미안하고 또 미안합니다.
아비는 자신의 혀를 잘 간수해야 합니다.
혀는 말을 할 때만 쓰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은 혀로 누군가를 찌르기도 합니다.
제재를 가하는 순간에 깊은 숨을 내쉬며 한 템포 쉬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을 동글동글하게 만들고,
아이의 대답을 기다려줘야 합니다.
그래서 그 말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해보면 어떨까' 라는 권유로 들릴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입니다.
그러려면 내 말이 곧장 관철되지 않아도 괜찮아, 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조금 시간이 걸려도 괜찮아, 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한 번에 모든 걸 해결하려는 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알다시피 이 세상에 그런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140.
뚜루뚜뚜루뚜의 방에 ‘생각하는 의자’가 만들어집니다.
규칙을 어기면 뚜루뚜뚜루뚜는 생각하는 의자에 앉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고작 의자 하나가 벽을 향해 덜렁 놓여 있는 거라,
아이가 고분고분 앉아 있을까 싶은데,
신기하게도 뚜루뚜뚜루뚜는 별 저항이 없습니다.
조금, 엉뚱한 상상을 하나 말해보자면,
이런 의자가 반드시 뚜루뚜뚜루뚜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아비에게도 나를 돌아보고, 잘못을 시인하고, 새로워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는
'생각하는 의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각하는 의자'에 앉았다가 일어난 뚜루뚜뚜루뚜는
마법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차분해집니다.
그러고 보면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강력한 제재가 아니라
행동을 멈추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과 장소일지도 모릅니다.
아비는 함께 지켜야 하는 규칙과 예절을 가르칩니다.
어른을 보면 눈을 맞추며 인사를 하고,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식당에서 조용히 하고,
건강을 위해 식사를 할 때에는 편식하지 말아야 하고,
누가 부르면 대답을 시원하게 하고.......
훈육을 하다 보면 딜레마에 빠집니다.
내가 한 인간을 훈육을 할 자격이나 있나 싶을 때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가 자라는데, 가만히 있을 수만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하기는 하는데,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한 때가 적지 않습니다.
어쩌면 나 자신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어떤 것들을
아이에게 하라고 하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나는 난감해집니다.
무엇보다 지금 내가 제대로 훈육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인지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육아와 관련된 책들을 틈틈이 읽기 시작합니다.
정말이지,
훈육은 어렵습니다.
141.
부모는 종종 강박에 시달립니다.
엄하게 해야 아이에게 공공의 규칙과 좋은 습관을 가르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첫 문장부터 과하게 말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생깁니다.
하지만 거친 말은 더욱 극렬한 저항을 불러올 뿐입니다.
바로 이 순간이 중요합니다.
유아심리학자는 훈육을 시작하는 이 첫 순간에 동감을 해주라고 권합니다.
‘첫 번째 문장’이 중요합니다.
“텔레비전 좀 그만 보라고 했지! 넌 대체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니!” 하고
일단 소리쳐버리면 그걸로 대화는 물 건너 가버립니다.
아비가 엄한 얼굴로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아이는 이미 긴장하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꾸중을 들을 것 같아 불안한데,
드디어 올 게 왔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는 바로 저항을 시작할 것입니다.
“아무리 봐도 뽀로로가 너무 재밌어서 또 보고 싶지?”
“게임이 자꾸만 또 하고 싶어?” 하고 동감을 표해준다면 어떻게 될까요?
큰 뚜루뚜는 눈매가 날카져서는 투덜거리고 있습니다.
나는 큰 뚜루뚜와 단둘이 있는 공간에서 반신반의하며 유아심리학자의 조언을 따릅니다.
나는 첫 문장부터 차분하게 말합니다.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애씁니다.
"그게, 그렇게 하고 싶었어?"
내가 동감을 표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날카롭던 아이의 표정이 동글동글해지더니,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릅니다.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애처로운 울음이 흘러나옵니다.
혼낼 줄 알았던 아빠가 내 마음을 알아주다니!
뚜루뚜뚜루뚜와 나 사이를 떠돌던 긴장된 공기 같은 것이
조용히 흩어집니다.
나는 아이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춥니다.
큰 뚜루뚜가 아비의 동감을 본능적으로 받아들이는 아이를 보며 나는 사랑을 느낍니다.
유아심리학자의 지침을 넘어선 감정이 내 안에서 뭉클거리며 피어오릅니다.
나는 큰 뚜루뚜의 머리를 쓰다듬어줍니다.
“그래도 텔레비전 너무 많이 보면 안 돼, 벌써 두 시간이나 봤잖아.”
큰 뚜루뚜는 내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아빠가 30분 더 보게 해줄게.
하지만 다음부터는 텔레비전 보는 시간만 보기로 하는 거야.
알았지?”
아이에게 설명을 한 이후에는 규칙을 정합니다.
오늘은 예외를 인정해주어서인지 큰 뚜루뚜는 선선히 고개를 주억거립니다.
이제 가장 중요한 마지막 과정이 남아 있습니다.
나는 아이를 향해 팔을 벌립니다.
큰 뚜루뚜는 내 품에 안깁니다.
이 마지막 포옹은 훈육의 대단원을 장식합니다.
울음을 그친 아이의 등을 손으로 쓸어줍니다.
아빠가 네가 미워서 그러는 거 아니야,
우리가 더 사이좋게 지내려고 그러는 거야, 라는 메시지를 저절로 나누게 됩니다.
나는 뚜루뚜뚜루뚜와 동감을 나누며 알게 됩니다.
이것은 비단 아이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아이나 아비나 어미나 할아버지나 할머니나 매한가지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동감을 원합니다.
인간이라면 무릇 그런 것입니다.
142.
아이가 자라면 경쟁이 치열한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때때로 아이가 뒤처지기도 할 것입니다.
인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깁니다.
한때의 뒤처짐으로 인해 상처를 주면 그 기간은 늘어나고, 상처는 깊어질 것입니다.
그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그 아픔이 생겨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동감을 표하는 것입니다.
아이의 마음에 동감을 표할 때에 아이도 아비의 마음에 동감할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는 그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아직은 수면 아래에 잠겨 있는,
놀라운 잠재력이 있습니다.
그것이 영원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것인지,
그것이 언젠가 때가 이르면 한 사람 안에서 분출할 것인지,
그것을 결정하는 중대한 요인 중 하나는
분명 동감입니다.
누군가 나를 믿어주고 지지해주고
너조차 모르는 네가 있다고,
네가 원하는 것을 하라고
응원한다고 믿을 때,
그 잠재력은 서서히 달구어집니다.
사랑을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겠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합니다.
사랑은 동감에서 시작합니다.
동감하지 않는 사랑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김이을 작가의 '뚜루뚜뚜루뚜와 함께 한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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