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간 쓰던 자판과 생이별했던 사연
인류 문자의 정점에 서있는 문자
"우리 한글은 기호체계는 익히기 쉬운 아주 효율적인 표음 문자인 동시에, 한 많고 사연 많은 우리 민족의 정서와 얼을 담아낼 수 있는 심오한 글이기도 합니다."
부러 우리말 우리글을 찬양하는 것은 아니고, 마을미디어에 몸담았던 시절 국어국문학과 게스트를 소개하며 뱉었던 인트로가 생각나 옮겨본 것이다. 평상시 한글을 대하는 필자의 아름다운(?) 마음씨가 묻어나는 문장
필자는 군 전역 직후 갤럭시 s2를 시작으로 스마트폰 월드에 입성했다. 모든 것들이 신세계였던 나에게 딱 한 가지 불편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자판.. 이전까지 싸이언 피처폰만 쓰던 유저에게 '천지인' 키보드란 손가락을 봉인하는 것에 필적하는 괴로움이었다.
해서 '가획'의 원리를 기준으로 가장 효율적인 자판을 찾던 중에, 아는 형님을 통해 영접한 것이 바로 딩굴 키보드. 위 이미지를 기준으로 'ㅁ'을 톡 하고 가볍게 누르면 그대로 'ㅁ'이 입력되고 아래로 밀면 'ㅂ'이 되며 위로 밀면 'ㅃ' 좌나 우로 밀면 'ㅍ'이 되는 원리이다. 와우.. 싸이언의 '획 추가' 노예였던 내 심장을 뛰게 만드는 작동방식..!
해당 동작에 어떤 글자가 타이핑되는지 모두 표기되어 있어('ㅖ'나 'ㅒ'는 왕복 동작이 필요) 익히기에 전~혀 불편함이 없었고, 심지어 'ㅋㅋㅋ' 버튼처럼 누르면 그대로 ㅋㅋㅋ가 입력되는(3번 연타하면 ㅋx9가 되는 것) 꿀기능을 찾아내는 맛도 있었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영어, 숫자, 이모티콘 파트는 따로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혁신 중의 혁신.
정체모를 앱 개발계의 세종대왕님 덕에 약 8년간 '안드로이드' 폰에서 한글을 가장 빠르게 쓸 수 있는 자판과 동고동락할 수 있었다.
두 달 전인 11월, 정든 갤럭시 s7을 뒤로하고 나는 생애 첫 아이폰을 영접했다. 아이폰용 딩굴 키보드도 있던지라 글자를 씀에 있어 '적응'이라는 것을 할애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한 달 후인 연말.. 느닷없이 나의 빠른 타자 속도를 일거에 봉인한 엄청난 녀석이 나타났다.
문자를 입력해야 할 란에 커서가 가는 순간 딩굴 키보드 대신 좁쌀 쿼티와 함께 등장하는 위협적인 문구. 범인은 안드 시절 겪어보지 못한 '애플 심사'라는 놈이었다. 업데이트해서 심사에 올렸지만 아직 통과하지 못한 채로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고, 언제 통과가 되어 정상적으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 더 놀라운 것은 이게 연례행사인 데다가 관련해서 기사도 났던 이력이 있다는 것..!
난생처음 방문해 본 딩굴 카페에도 사람들이 외치는 정체 모를 아우성이 수두룩했다. 인간관계가 끊긴다, 새해 인사를 못한다, 이러다가 아싸 되고 왕따 된다 등등.. 그렇게 취객의 언어인 듯 자세히 보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는 오타 범벅 문자로 사람들은 글을 남기고 댓글을 달며 서로를 위로했다.
그렇게 좁쌀 쿼티에 잠식당하며 점점 오타가 줄어가던 어느 새벽 (첼시 vs 토트넘 카라바오 컵 4강 1차전 경기가 있던 시각) 문득 카페에 들어갔는데, 외계어가 난무해야 할 게시판에 감사 인사가 한가득..?!
갑자기 찾아온 딩복절에 경건한 자세로 앱을 재설치했고 쿼티에 물든 두 엄지의 감각을 원상복구 하는데 3분이면 충분했다. 모두가 잠든 새벽 딩복절을 온전히 즐기기 위해 평소 쓰지도 않는 글을 쓰며 밤을 새운 것은 덤.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키보드를 사용하겠습니다. 유료로 전환해도 군말 없이 구독료를 내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댁내 평화와 안녕이 언제나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대 모바일 시대에 글자를 빼앗겼다 수복한 독특한 경험에서 비롯된 오늘의 뻘글리쉬도 여기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