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얼굴이 타인의 작품이 될 때
피카소에게는 일곱 명의 여자가 있었다. 미술사는 그의 작품 시기를 여자의 이름으로 구분한다. 페르낭드 시대, 에바 시대, 올가 시대, 마리 테레즈 시대, 도라 시대, 프랑수아즈 시대, 재클린 시대. 이 구분법 자체가 이미 하나의 고발이다. 한 남자의 연대기를 여자의 교체로 기록한다는 것. 여자가 시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여자를 시기로 소비한다는 것.
도라 마르. 1907년 파리 출생, 유고슬라비아와 프랑스의 이중 배경.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피카소를 만나기 전에 이미 파리 아방가르드의 중심에 있었다. 만 레이, 브라사이와 동시대에 작업했고, 초현실주의 사진의 핵심 작가 중 하나였다. 이것을 먼저 기록해야 한다. 도라 마르는 피카소의 뮤즈이기 전에 작가였다.
1936년, 피카소와 도라가 만났다. 카페에서 도라가 장갑 낀 손가락 사이로 칼을 내리꽂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칼끝이 지나가는 위험한 놀이. 피카소는 그 장면에 매료되었다. 여기서 이미 구조가 보인다. 피카소가 끌린 것은 도라의 사진이나 지성이 아니라, 자기 몸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행위였다.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 여자. 아니, 상처를 유희로 만드는 여자. 피카소의 아니마 투사는 이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7년간, 피카소는 도라의 초상화를 수십 점 그렸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우는 여인》 연작이다. 1937년, 스페인 내전의 참상에 충격받아 《게르니카》를 그리던 시기. 피카소는 도라의 얼굴을 입체파 기법으로 해체했다. 눈은 정면과 측면이 동시에 보이고, 코는 비틀어져 있고, 입은 찢어져 있다. 눈물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눈에서 튀어나온다.
피카소는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도라는 항상 우는 여인이었다."
이 문장의 폭력성을 읽어야 한다. 도라가 우는 여인이었던 것이 아니다. 피카소가 도라를 우는 여인으로 만든 것이다. 동시에 다른 여자 마리 테레즈와 관계를 유지하면서 도라를 울렸고, 그 울음을 그렸다. 고통을 유발한 사람이 고통을 기록하는 구조. 가해자가 증언자를 겸하는 구조.
카미유 클로델의 경우, 로댕은 작품을 가져갔다. 프리다 칼로의 경우, 디에고는 마음을 부쉈다. 하지만 피카소는 한 단계 더 나아갔다. 얼굴을 가져갔다. 도라의 얼굴을 문자 그대로 해체하여 자기 작품으로 만들었다. 뮤즈의 몸이 소비되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 몸도 아니고 작품도 아니고, 얼굴 — 한 사람의 정체성 그 자체를 캔버스 위에서 부순 것이다.
1943년, 피카소가 새 연인 프랑수아즈 질로를 만나면서 도라와의 관계는 끝났다. 이후 도라에게 일어난 일이 이 시리즈의 핵심적 장면이다. 도라는 사진을 그만두었다. 초현실주의의 최전선에 있던 사진가가,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대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점차 종교에 귀의했으며, 파리 시내 아파트에서 은둔하며 살았다. 수십 년간. 피카소의 유작을 한 점도 팔지 않은 채로.
카미유는 작품을 부쉈다. 도라는 자기 자신을 지웠다. 카미유의 파괴가 바깥을 향한 것이라면, 도라의 침묵은 안을 향한 것이다. 둘 다 거울이 깨진 뒤의 반응이지만, 방향이 다르다. 카미유는 부서진 거울의 파편을 세상에 던졌고, 도라는 부서진 거울 뒤에 숨었다.
하지만 한 가지를 더 봐야 한다. 도라는 피카소의 《게르니카》 제작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한 유일한 사람이다. 20세기 최고의 반전 회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카메라로 잡은 것은 피카소가 아니라 도라였다. 이 사진들이 없었다면, 《게르니카》의 창작 과정은 영원히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기록한 사람은 도라인데, 역사에 남은 것은 피카소의 그림이다. 결과만 남고 기록한 사람은 남지 않는다.
우는 여인이 아니었다. 기록하는 여인이었다. 그 기록이 삭제되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