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을 준 여인이라는 아름다운 삭제
뮤즈.
이 단어를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아름다운 여인, 예술가의 곁에 선 여자, 영감의 원천. 대부분은 그렇게 답할 것이다. 그리고 그 답 자체가, 이미 하나의 폭력이다.
뮤즈의 어원은 그리스 신화의 무사히(Mousai)다.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의 딸들. 아홉 자매가 각각 서사시, 서정시, 비극, 희극, 음악, 무용, 찬가, 천문, 역사를 관장했다. 주목할 것은 이 여신들이 '영감을 주는 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각 분야의 주인이었다. 관장자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뮤즈는 '영감을 주는 여자'로 축소되었다. 주인에서 매개체로. 주체에서 도구로.
이 축소의 역사가 곧 이 시리즈의 출발점이다.
로댕에게 카미유 클로델이 있었다. 디에고 리베라에게 프리다 칼로가 있었다. 단테에게 베아트리체가, 페트라르카에게 라우라가 있었다. 조선의 사대부에게는 황진이가 있었고, 화원에게는 이름 모를 기생이 있었다.
이 문장들의 구조를 보라. 전부 '남자에게 여자가 있었다'는 형식이다. 소유격이다. 여자는 남자의 세계에 속한 부속물로 기술된다. 그 여자가 무엇을 느꼈는지, 무엇을 잃었는지, 무엇을 견뎠는지는 이 문장 구조 안에 들어갈 자리가 없다.
뮤즈라는 호칭은 찬사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 찬사의 구조를 뜯어보면, 이것은 이름 없이 소비된 여자에게 붙인 아름다운 사후 딱지에 가깝다. 네가 겪은 고통, 네가 가진 재능, 네가 만든 작품 — 그 모든 것을 '영감'이라는 한 단어로 압축해서 남성 예술가의 이력에 편입시키는 장치.
카미유 클로델은 로댕보다 뛰어난 조각가였다. 프리다 칼로는 디에고 없이도 자기 세계를 가진 화가였다. 황진이는 사대부의 놀이 상대가 아니라 조선 최고의 시인 중 하나였다. 궁녀들의 손은 왕의 밥상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을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여자들을 '뮤즈'라고 부른다. 그 순간, 그들의 작품은 사라지고 그들의 아름다움만 남는다. 그들의 고통은 사라지고 그들이 준 영감만 남는다. 결과만 남고 사람은 남지 않는다.
이 시리즈는 그 삭제된 자리를 복원하려는 시도다.
나는 뮤즈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상처를 보려 한다. 영감의 원천이 아니라 고통의 구조를 읽으려 한다. 이 여자들이 왜 그토록 강렬한 존재였는지를 —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부서졌기 때문에'라는 방향에서 묻겠다.
상처가 예술이 되는 메커니즘. 그것이 이 시리즈의 진짜 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