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 — 기생이 시인이 되는 구조

모두의 뮤즈, 자기만의 시인

by 응시

1. 명월 — 이름부터 소비된 여자

황진이.

기명(妓名)은 명월(明月). 밝은 달.


달은 보는 것이지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달은 비추는 것이지 자기 빛을 내는 것이 아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황진이를 그렇게 불렀다. 명월. 우리가 바라보는 달.

카미유는 '로댕의 연인'으로 불렸다. 도라는 '우는 여인'으로 불렸다. 젤다는 '스콧의 아내'로 불렸다. 전부 타인의 시선이 붙인 이름이다.


하지만 한 가지 차이가 있다. 카미유에게는 로댕이라는 특정한 남자가 있었다. 도라에게는 피카소가, 젤다에게는 스콧이 있었다. 황진이에게는 특정한 한 남자가 없었다.


황진이는 누구의 뮤즈였는가.

모두의 뮤즈였다. 기방에 온 수십, 수백 명의 사대부들이 황진이를 보고 시를 썼고, 야담을 남겼고, 기록을 했다. 서양에서는 일대일로 착취된다. 조선에서는 일대다로 소비된다. 특정 가해자가 없다. 그래서 더 보이지 않는다.


2. 풍류라는 포장 — 사대부의 위선적 취향

기생은 예술가였다.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하지만 기방에 간 사대부가 정말 시를 들으러 간 것일까.


순서를 다시 보자. 향락이 먼저이고, 풍류는 그 향락에 문화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사후적 포장이다. "나는 황진이의 시에 감탄했다." 이 문장은 기방 출입의 알리바이다.


로댕은 적어도 카미유의 재능이 진짜 필요했다. 피카소에게 도라의 지성은 진짜 자극이었다. 스콧에게 젤다의 언어는 진짜 소재였다. 착취였지만, 예술적 필요는 실재했다.


사대부에게 황진이의 시는 진짜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필요했던 것은 따로 있고, 시는 그것의 문화적 알리바이였다. 포장이 한 겹 더 있다는 점에서, 조선의 뮤즈 구조가 더 위선적이다.


3. 시조 — 소비되지 않는 유일한 것

그 구조 안에서 황진이는 시를 썼다.

왜 쓸 수 있었을까. 역설적이지만, 기생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양반 여성은 욕망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허난설헌은 양반가의 딸이었고, 수백 편의 한시를 남긴 뛰어난 시인이었다. 하지만 남편에게 인정받지 못했고, 죽으면서 자기 작품을 전부 불태우라고 유언했다. 남동생 허균이 기억으로 복원하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허난설헌은 쓸 수 있었지만, 남기기를 거부했다.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 자기 작품을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황진이는 다르다. 기생은 이미 사회적으로 탈락한 존재다. 잃을 체면이 없다. 수잔 발라동이 밑바닥 출신이라 잃을 것이 없어서 모델에서 화가로 전환할 수 있었듯, 황진이는 기생이라는 신분이 역설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주었다. 사대부 시조에서는 불가능한 것 — 육체적 그리움, 시간에 대한 통제 욕망, 이별의 신체적 감각 — 을 황진이는 쓸 수 있었다.


시조의 형식은 사대부의 것이었다. 하지만 황진이가 그 형식 안에 넣은 내용은 사대부가 말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형식은 빌렸지만 내용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4. 밤을 베어 내다 —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을 언어에서 수행하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 /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 어른 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비구비 펴리라"


사대부들은 이 시조를 기생다운 유희, 기생다운 관능으로 읽었다.


다시 보자.

밤을 '베어 낸다'. 시간을 물리적으로 자르는 행위다. 기생에게 시간은 자기 것이 아니다. 손님이 오면 열리고, 손님이 가면 닫히는 시간. 자기 의지로 시간을 배분할 수 없는 존재가, 시 안에서만큼은 시간을 잘라내고 접어 넣고 다시 편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통제를, 언어 안에서 수행하는 것.

프리다가 통증에 형태를 주어 통증과 자기 사이에 캔버스 한 장의 거리를 만들었듯, 황진이는 소비되는 시간에 형태를 주어 시간과 자기 사이에 시조 한 수의 거리를 만든 것이다.


몸은 기방에서 소비되었지만, 시조는 소비되지 않았다. 몸은 모두의 것이었지만, 언어는 자기 것이었다.


5. 살아서도 죽어서도 — 임제의 시조

황진이는 살아서 소비되었고, 죽어서도 소비되었다.

임제(林悌). 조선 중기 문인. 황진이 사후에 개성을 지나다 그 무덤에 들러 읊은 시조.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 홍안을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홍안을 어디 두고" — 아름다운 얼굴이 어디 갔느냐. 시를 애도하는 것이 아니다. 얼굴을 애도하고 있다. 시인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뮤즈를 그리워하고 있다. 풍류의 포장이 벗겨지는 순간, 남는 것은 향락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많은 사람이 황진이의 시조보다 임제의 이 시조를 먼저 떠올린다.


황진이가 쓴 시보다, 황진이를 소재로 한 남자의 시가 더 유명한 상황.


젤다의 문장보다 스콧의 소설이 더 유명한 것과 같은 구조다. 원본보다 원본을 소비한 기록이 더 많이 알려지는 구조.


6. 뮤즈이면서 시인 — 분열하는 존재

황진이의 자리는 이 시리즈에서 독특하다.

카미유는 뮤즈로 소비당하다가 작가로 전환하려 했고, 파괴되었다. 프리다는 뮤즈로 소비당하면서 동시에 자기 예술을 만들었고, 후기에 전환했다. 젤다는 뮤즈로 소멸되었고, 작가로의 전환이 차단되었다. 루 살로메는 처음부터 거울이 되기를 거부했다.


황진이는 거부할 수 없었다. 기생이라는 신분이 거부를 허락하지 않았다. 몸은 뮤즈로 소비되면서, 손은 시인으로 쓰는 것. 소비와 창작이 동시에 일어난다. 전환이 아니라 분열이다.


이 분열이 황진이의 시조에 긴장을 만든다. "동짓달 기나긴 밤"의 관능은 기방에서 소비되는 몸의 경험에서 오고, "베어 내어"의 통제 욕망은 시인으로서의 자기에서 온다. 한 시조 안에 뮤즈와 작가가 동시에 있다.


서양의 뮤즈들은 이 둘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거울이 되거나, 거울을 깨거나. 황진이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둘을 동시에 살아야 했다.


7. 여섯 수의 무게

황진이만이 아니다. 홍랑의 "묏버들 가려 꺾어"가 있고, 이매창의 《매창집》이 있다. 하지만 이 이름들조차 손에 꼽힌다. 수만 명의 기생 중 시가 전해지는 사람이 서넛이라는 것. 나머지의 시는 기록되지 않았다. 사대부가 기록하지 않으면 남지 않는 구조. 기생의 예술은 사대부의 선택에 의해서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허난설헌은 쓸 수 있었지만 스스로 지웠다.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 남기기를 거부했다.


황진이의 시조는 사대부의 야담집과 시화집 안에 갇혀 전해졌다. "기생 황진이가 이렇게 읊었다"는 사대부의 해설 안에 담겨서. 자기 선택이 아니라, 타인의 프레임 안에서 겨우 살아남은 것이다.


살아서는 사대부의 풍류로 소비되고. 죽어서는 임제의 시로 소비되고. 양반 여성은 스스로 지웠는데. 기생의 시조 여섯 수만, 사대부의 틀 안에 갇혀서 살아남았다.

그래도 남았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사대부의 해설을 걷어내고 시조만 읽을 수 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이 문장의 주어는 황진이다. 기생이 아니라 시인이다. 명월이 아니라 황진이다. 모두의 뮤즈가 아니라, 자기 언어의 주인이다.


그 전환에 600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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