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이라는 가장 성숙한 방어"
1. 장면
1982년 인천. 한국 프로야구가 시작된 해다. 갓 중학생이 된 소년은 인천 연고팀 삼미 슈퍼스타즈의 팬이 되기로 한다. 왜 하필 삼미인가. 소설은 명확한 이유를 주지 않는다. 그냥 삼미다. 인천에 살고, 인천 팀이니까.
삼미는 진다. 출범 첫해 승률 0.213. 매일 진다. 소년은 절친 조성훈과 둘이서 삼미 팬클럽을 결성한다. 처음에는 친구들이 몇 명 있었다. 그러나 하나둘 변절한다. 한 친구는 "부평은 거의 서울에 가까우니까"라는 변명을 남기고 서울 연고팀 MBC 청룡 팬이 된다. 팬클럽 회원은 줄어들고, 결국 소년과 조성훈 둘만 남는다.
1983년, 잠깐 희망이 온다. 불세출의 투수 장명부를 일본에서 영입하고, 삼미는 기적 같은 승리를 이어간다. 82년과 정반대의 신기록. 소년과 조성훈은 들뜬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꼴찌. 희망은 잠깐이었고, 프로의 세계는 냉혹했다.
4 시즌 연속 꼴찌.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많이 진 팀. 관중이 사라지고, 선수들도 의욕을 잃는다. 그래도 소년은 경기장에 간다. 라디오를 켠다. 스코어보드를 확인한다.
1985년 6월, 삼미는 청보 핀토스에 팀을 넘기고 사라진다. 마지막 경기는 롯데에 6대 16 대패. 마지막까지 약체의 이미지를 남기고 사라졌다.
시간이 흐른다. 소년은 어른이 된다. 80년대와 90년대의 격변을 살아온다. IMF를 겪고, 아내에게 이혼당하고, 자본주의의 냉혹함 속에서 자신의 시간을 팔며 살아간다. 어느 날 깨닫는다. 자기가 팔았던 것은 능력이 아니라 시간이었고, 시간을 판다는 것은 삶을 파는 것이었다.
삼미는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런데 소년은 — 이제 중년이 된 사내는 — 여전히 삼미의 팬이다. 소설의 마지막.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야구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것이었다." 팀은 사라졌지만, 응원했던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박민규의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이 한 문장을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다. 지는 줄 알면서 응원하는 마음. 끝이 있다는 걸 알면서 사랑하는 마음. 이것은 야구 소설인가. 아니다. 이것은 방어기제의 소설이다. 그리고 이 시리즈의 마지막 편이다.
2. 명명
유머. 프로이트가 방어기제 중 가장 성숙한 것으로 분류한 기제다.
유머의 정의는 단순하다. 고통을 직면한 채로 웃는 것. 그런데 이 단순한 정의 안에 이 시리즈의 모든 것이 압축되어 있다.
앞선 15편의 방어기제는 모두 고통을 변형했다. 억압은 밀어냈다. 투사는 남에게 옮겼다. 합리화는 논리로 포장했다. 퇴행은 과거로 돌아갔다. 반동형성은 반대로 뒤집었다. 승화는 형태를 바꿨다. 부정은 의미를 차단했다. 전치는 대상을 바꿨다. 주지화는 온도를 지웠다. 동일시는 타인이 되었다. 격리는 감정을 분리했다. 취소는 되돌리려 했다. 분열은 세계를 나눴다. 해리는 자기를 나눴다. 신체화는 몸에 맡겼다.
유머만 고통을 변형하지 않는다. 고통을 그대로 둔다. 그리고 웃는다.
3. 독해
왜 유머였을까
삼미 슈퍼스타즈를 응원하는 것은, 앞선 열다섯 편의 방어기제가 모두 실패한 자리에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하나씩 검토해 보자.
억압할 수 있는가. 삼미가 진다는 사실을 기억에서 밀어낼 수 있는가. 없다. 매일 스코어보드에 뜬다.
투사할 수 있는가. "심판이 편파적이다", "상대가 비겁하다"라고 할 수 있는가. 4 시즌 연속 꼴찌에서 이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합리화할 수 있는가. "올해는 재건의해다", "내년에는 다를 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가. 1년이면 가능하다. 4년 연속은 합리화의 한계를 넘는다.
퇴행할 수 있는가. 프로야구가 없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가. 없다. 이미 팬이 되어버렸다.
반동형성을 할 수 있는가. "나는 삼미 따위 관심 없다"라고 뒤집을 수 있는가. 경기장에 가고 있으면서.
승화할 수 있는가. 삼미의 패배를 예술로 바꿀 수 있는가. 실제로 박민규가 한 것이 이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의 소년은 작가가 아니다. 도구가 없다.
부정할 수 있는가. 삼미가 지고 있다는 사실의 의미를 차단할 수 있는가. 소년에게는 감정이 있다. 질 때마다 아프다.
전치할 수 있는가. 삼미에 대한 감정을 다른 팀에 옮길 수 있는가. "부평은 거의 서울에 가까우니까"라고 말한 친구가 전치다. 소년은 그 친구를 변절자라 부른다.
주지화할 수 있는가. "투수력 부족, 타선 빈약, 수비 불안정." 분석은 가능하다. 그러나 분석한다고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격리할 수 있는가. 경기를 보면서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가. 그러면 팬이 아니다.
취소할 수 있는가. 어제의 패배를 되돌릴 수 있는가. 스코어보드는 되돌릴 수 없다.
분열할 수 있는가. 삼미를 "원래 좋은 팀인데 운이 나쁜 것"과 "진짜 약한 팀"으로 나눌 수 있는가. 장명부의 해가 그 시도였다. 희망과 좌절이 교차하는 한 시즌. 그러나 4년 꼴찌 앞에서 이상화는 무너진다.
해리할 수 있는가. 현실에서 떠날 수 있는가. 소년은 매일 스코어를 확인한다. 도망치지 않는다.
신체화할 수 있는가. 삼미의 패배가 몸에 쌓여 아플 수 있는가. 아플 수 있다. 그러나 소년은 내일도 경기장에 간다.
열다섯 가지가 모두 실패한 자리
열다섯 가지 방어기제가 모두 작동하지 않거나, 작동해도 충분하지 않은 자리에서 남는 것이 유머다.
유머는 이렇게 말한다. "삼미는 진다. 내일도 질 것이다. 그래도 응원한다."
이 문장에는 부정이 없다. 사실을 인정한다. 합리화도 없다. 내일 이길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전치도 없다. 다른 팀으로 옮기지 않는다. 승화도 아니다. 패배를 예술로 바꾸지 않는다. 패배는 그냥 패배다.
다만 패배 앞에서 무너지지 않는다. 여기가 유머의 자리다.
유머의 구조는 역설이다.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응원하는 것. 끝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 사랑하는 것. 삼미가 사라질 것을 알면서 팬으로 남는 것. 현실을 왜곡하지 않고,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현실 앞에 서서 — 그래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
위대한 개츠비와 대비된다. 개츠비의 위대함은 환상을 끝까지 믿는 것이었다. 현실을 왜곡하고도 무너지지 않는 것. 유머는 반대편에 있다. 현실을 왜곡하지 않고도 무너지지 않는 것. 개츠비가 눈을 감고 견디는 것이라면, 유머는 눈을 뜨고 견디는 것이다.
삼미가 사라진 뒤에도
1985년 삼미는 사라진다. 소년은 어른이 된다. IMF가 오고, 이혼을 당하고, 삶의 시간을 팔며 살아간다. 팀이 사라져도, 인생이 무너져도, 그는 여전히 삼미의 마지막 팬클럽 회원이다.
이것이 유머가 다른 방어기제와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다. 다른 방어기제들은 대상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진다. 8편에서 윤희중의 전치는 무진을 떠나자 증발했다. 대리 대상이 사라지면 감정도 사라졌다. 10편에서 영수의 동일시는 아버지가 죽자 아버지가 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대상이 사라지면 대상을 대체해야 했다.
유머는 대상이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는다. 삼미가 없어져도 삼미를 응원했던 마음은 남는다. 유머의 대상은 삼미가 아니라, 삼미를 응원하는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지는 줄 알면서 응원하는 바보 같은 나. 그 나를 바라보며 웃는 것. 이것이 유머다.
프로이트는 유머를 "초자아의 선물"이라 불렀다. 초자아는 보통 "이래서는 안 된다"라고 꾸짖는 내면의 목소리다. 그러나 유머에서 초자아는 꾸짖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이 자아가 이렇게 힘든 데도 잘 버텨주고 있지 않은가." 자기를 질책하는 대신 자기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것.
소년이 어른이 되어, IMF를 겪고, 이혼을 당하고, 삶이 무너진 자리에서 삼미를 떠올리는 것.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야구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것이었다." 이 문장이 초자아의 선물이다. 삼미를 응원하느라 인생을 헛살았다고 질책하는 대신, 삼미를 응원할 수 있었던 자기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것.
4. 돌아봄
이 시리즈는 열다섯 가지의 방어기제를 걸어왔다. 매 편마다 물었다. 왜 하필 이 방어기제였을까. 왜 다른 것이 아니라 이것이었을까. 박완서의 화자는 왜 억압이었고, 이상의 화자는 왜 투사였고, 뫼르소는 왜 부정이었고, 피콜라는 왜 해리였는가.
대답은 매번 같았다. 선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어기제는 선택이 아니라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 도망칠 수 있으면 억압이 되고, 도망칠 수 없으면 해리가 된다. 도구가 있으면 승화가 되고, 도구가 없으면 동일시가 된다. 안전지대가 있으면 기억을 밀어낼 수 있고, 안전지대가 없으면 몸이 대신 짊어진다.
유머만이 조건이 아니라 태도다.
모든 방어기제가 실패한 자리에서, 그래도 무너지지 않겠다는 태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그래도 응원하겠다는 태도. 삶이 고통이라는 것을 알면서, 그래도 살아가겠다는 태도.
유머는 고통을 없애지 않는다. 고통을 변형하지도 않는다. 고통을 있는 그대로 두고, 그 옆에 앉는 것이다. 그리고 살짝 웃는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가장 쓰기 어려운 감정이 유머다. 슬프게 쓰는 것보다, 아프게 쓰는 것보다, 무섭게 쓰는 것보다 — 웃기면서 동시에 아프게 쓰는 것이 가장 어렵다. 박민규가 삼미로 그것을 해냈다. 질 줄 알면서 응원하는 이야기를 읽으며 독자는 웃는다. 그리고 웃다가 울컥한다. 웃음과 울컥함이 동시에 오는 순간. 그 순간이 유머의 자리다.
유머하는 캐릭터를 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인물이 먼저 아파야 한다는 것이다. 아프지 않은 사람의 유머는 농담이다. 아픈 사람이 웃을 때, 그 웃음이 유머가 된다. 1편부터 15편까지의 고통을 거친 뒤에야 16편의 유머에 도달할 수 있듯이, 캐릭터도 충분히 아픈 뒤에야 유머에 도달할 수 있다.
이 시리즈의 첫 편에서 물었다. 소설 속 인물이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는지를 아는 것. 그것이 캐릭터를 쓰는 힘이 된다고. 마지막 편에서 하나를 더 보탤 수 있다.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는지를 알고 난 뒤, 그래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유머이고, 가장 성숙한 방어기제다.
삼미는 사라졌다. 그러나 삼미를 응원했던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는 줄 알면서 응원하는 마음. 끝이 있다는 걸 알면서 사랑하는 마음. 그 마음이 유머이고, 그 마음이 우리를 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