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웠다, 그리고 아름다워야 했다
우리는 기생을 아름답다고 말한다.
한복의 선이 아름답다. 살풀이춤의 절제가 아름답다. 시조의 여운이 아름답다. 기생은 조선의 미(美)를 대표하는 존재로 이야기된다. 박물관에 기생의 복식이 전시되고, 관광 안내서에 기생 문화가 소개되고, 드라마에 기생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아름답다.
그런데 이 "아름답다"는 말이 가리는 것이 있다.
기생의 한복이 아름다웠던 이유를 우리는 잘 말하지 않는다. 저고리의 깃이 단정해야 했던 이유는 손님의 눈에 들기 위해서였다. 치마의 선이 분명해야 했던 이유는 다른 기생과 경쟁하기 위해서였다. 걸음이 절제돼야 했던 이유는 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아름다움의 안쪽에 생존이 있었다.
살풀이춤의 절제가 아름다운 이유도 마찬가지다. 절제는 억제에서 태어났다. 마음껏 움직일 수 없는 몸이 허락된 범위 안에서 최대한 표현하려 할 때 절제가 생긴다. 절제를 아름답다고 부르는 것은 보는 사람의 시선이다. 추는 사람에게 절제는 제약이었을 수도 있다.
우리가 "아름답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보는 사람의 위치에 서 있다. 마루 가운데 앉은 손님의 위치다. 빛의 원 안에서 바깥을 보는 위치다. 그 위치에서 기생은 아름답다.
끝자리에서 보면 다르다.
끝자리에 앉은 기생에게 아름다움은 부담이었다. 아름다워야 살아남았다. 아름답지 못하면 밀려났다. 아름다움은 선택이 아니라 조건이었다.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퇴기 됐다. 퇴기 되면 기록에서 사라졌다.
우리가 기생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살아남은 기생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살아남지 못한 기생의 아름다움은 이야기되지 않는다. 기록에 남은 기생은 아름다웠다. 기록에 남지 않은 기생이 아름답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살아남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생존 편향이다. 살아남은 것만 보고 전체를 판단하는 오류. 우리가 아는 기생은 살아남은 기생이고, 살아남은 기생은 아름다운 기생이고, 그래서 기생은 아름답다고 결론짓는다. 이 결론에서 빠진 것은 살아남지 못한 기생이다.
기생을 낭만화하는 방식도 이 편향 위에 서 있다.
드라마에서 기생은 재능 있고 당당한 여성으로 그려진다. 권력에 맞서고, 사랑을 쟁취하고, 자기 길을 간다. 이것은 현대인의 욕망을 기생에게 투사한 것이다. 조선의 기생에게 "당당함"은 허락되지 않았다. 당당하면 퇴기 됐다.
기생을 문화유산으로 박제하는 것도 같은 구조다. 가곡이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이 됐다. 살풀이춤이 무형문화재가 됐다. 이것은 보존이다. 그러나 보존되는 것은 기술이지 삶이 아니다. 가곡의 선율은 보존되지만, 그 선율을 불렀던 기생의 밤은 보존되지 않는다. 기술만 남기고 삶을 지우는 것. 이것도 가리는 방식 중 하나다.
심리학에서 이것을 방어기제라고 부른다. 불편한 현실을 직면하지 않기 위해 현실을 바꿔서 인식하는 것이다. 기생의 삶이 불편하다. 착취와 대상화와 트라우마가 불편하다. 그래서 아름다움으로 덮는다. 덮으면 편해진다. 보는 사람이 편해진다.
보는 사람이 편해질 때, 보이는 사람의 삶은 사라진다.
이 에세이 시리즈를 쓰면서 나는 계속 한 가지를 반복했다. 기록에 없다. 기록에 남지 않았다. 기록되지 않은 채로. 이 반복이 의도적이었다. 기생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록되지 않은 것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록되지 않은 것이다. 다른 하나는 존재했으나 기록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됐기 때문에 기록되지 않은 것이다. 기생의 삶은 후자다. 존재했다. 기록되지 않았을 뿐이다.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쉽다. 아름다움 뒤에 무엇이 있었는지 묻는 것은 어렵다. 쉬운 쪽을 선택하면 보는 사람은 편하다. 어려운 쪽을 선택하면 보이는 사람의 삶이 비로소 보인다.
기생은 아름다웠다. 그것은 사실이다.
기생은 아름다워야 했다. 이것도 사실이다.
두 문장 사이의 거리가 이 시리즈 전체의 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