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글쓰기가 소극적 저항이라면, 책 읽기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요
최근 도저히 책을 읽지 못하고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25분경 긴급 담화를 통해서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순간부터, 윤석열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국민의힘 국회의원들의 투표 불참으로 인하여 가/부결이 아닌 불성립 되었다는 우원식 국회의장의 선언을 들었던 밤을 지나 이 글을 쓰는 이 순간까지 그렇습니다. 12월 7일 저녁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는 주최 측 추산 100만 명의 시민들이 모여 내란 쿠데타를 일으킨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을 외쳤습니다.
저는 5.18 민주광장에서 열린 광주시민 4차 총궐기대회에 다녀왔습니다. 탄핵 소추안이 불성립되고 임시 국회를 열어 재상정할 것이며 끝까지 멈추지 않겠다는 야당 의원들의 말을 들어도, 내일 다시 모이자는 말을 뒤로하고 비를 털며 광장에서 집까지 돌아오는 길에 차오르는 것은 무력감과 분노, 그리고 정의할 수 없는 여러 불순물 가득한 탁한 기분입니다. 보통 이런 기분이 들 때에는 책을 읽는데, 안전한 책 속 세계로 진입하는 감각이 느껴지는 순간 수치심이 몰려들어 집었다 내려두기를 반복합니다.
1980년 광주의 오월을 아는 국회의원은 대검에 찔리는 한이 있어도 국회에서 죽어야 한다고 달려가고, 무장 군인의 총구가 심장에 겨눠진 대변인은 맨몸으로 그 앞을 막아서고, 사람들은 스크럼을 짜고, 기물을 모아 문을 막습니다. 헬기가 착륙하는 모습을 보고 (오월광주를 듣고 자란 나는 그들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아직도 너무 쉽게 죽습니다. 학생들은 수학여행 가는 배에 타서 죽고, 청년들은 경찰 인력 배치를 하지 않아 길거리에서 깔려 죽고, 노동자들은 두 명이 하는 작업을 비용 문제로 홀로 하다가 안전장치가 미설치된 기계에 끼어 죽고, 에어컨을 설치하다 폭염 질환으로 죽고, 기후재난 취약계층은 지독한 한파에도 오른 가스비에 얼어 죽고, 장애인들은 엘리베이터 없이 리프트로 지하철을 타러 가다 죽고, 여성들은 가정 내의 일이라는 이유로 개입하지 않는 경찰의 태도에 남편에게 맞아 죽고, 이별을 고했다는 이유로 남자 친구에게 찔려 죽고, 퀴어들은 시스젠더 헤테로 중심 사회의 정상성에 숨 막혀 죽습니다.
작금의 현실에서 글쓰기가 세상에 대한 소극적 저항이라고 한다면, 책 읽기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요? 지금, 이 시점에 굳이 저는 묻고 싶습니다. 자아를 잃는 몰입의 경지에서 이뤄지는 책 읽기가 어떤 방식으로 개인을 넘어선 사회에 도움이 될까요? 독서모임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이러한 세상에도 우리는 계속 책을 읽어야 한다고 어떻게 말해야 합니까?
책 읽기는 큰 의심 없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작년부터 책 읽기가 좋은 것이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기 어려워졌습니다. 독서하는 이유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 행동인지, 자아 정체성마저 자본으로 만들고 마는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독서가 지닌 지적 아우라라는 가치를 획득하기 위함인지, 혹은 독서가 비과시적 소비를 통해 계급 재생산을 하는 “야망 계급”의 새로운 구별짓기 기준이 되어 계급에서 탈락하고 싶지 않은 발버둥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독서를 과시라고 말하는 이들의 주장에서, 나의 독서를 비춰보며 ‘여성/퀴어/노동자/장애인과 같은 사회적 소수자’의 독서가 과시밖에 될 수 없는 지점 또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어떤 이들의 독서는 왜 과시 이상이 되지 않습니까? ‘여자들이(나) 읽는 책’에 진득하게 붙은 부정적 의미는 어떻게 형성되었습니까?) 수도권 거주 중산층 고학력 여성의 평범성을 주장하며 여성혐오 경험을 일반화하는 ‘내가 000이다’라는 정치적 문구가 여성인 ‘나’를 비껴갈 때, 저자가 ‘나’와 절대 같지 않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증명함으로써 정치적 순수성을 차지해 내고야 말 때, 독자라는 집단의 익명성에 기대지 못한 수치심 가득한 ‘나’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책 읽기는 아주 사적이고 내밀한 경험입니다. 일부 애서가들은 책장을 공개하길 꺼리기도 하는데, 이는 자신이 읽는 책의 목록이 자신을 대변하는 것처럼 쉽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책 ‘읽기’에 대한 경험은 전혀 다른 무언가인데도 우리는 공유되는 텍스트가 있다는 생각에 쉽게, ‘읽기’를 하나의 줄기에서 뻗어나가는 여러 줄기의 가지의 모양으로 상상합니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의 저자 피에르 바야르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서로 같은 책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 우리가 읽은 ‘같은 책’은 없습니다. 읽기는 곧 변형입니다. 물리적인 세계에서 같은 책이란 (보르헤스는 반대하겠으나) ‘앞표지부터 뒤표지까지 모든 텍스트를 포함한 요소가 동일하게 인쇄된 책’이지만 읽기는 그 텍스트가 인간의 내부에서 해체 후 재조립되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텍스트를 씹어 삼켜 두꺼운 외피 속 연한 살점으로 밀어 넣은 후 자신 혹은 텍스트를 지독하게 상처입힌 후 배출합니다. 이렇게 배출된 책으로만 이야기할 수 있으며 각자 배출한 책은 결코 동일한 책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동일성을 담보로 책 읽기는 사적 경험을 탈피할 힘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책 읽기로 발화할 수 있는 공적 경험은 ‘우리는 배출함으로써 독자가 되었다’라는 선언입니다. 이것은 공감이나 이해와 전혀 다릅니다.
일부 사람들은 독서모임으로 인하여 타인을 이해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여러 시각을 얻을 수 있다고들 말하지만, 2년간 독서모임에 참여하면서 느낀 점은 이런 것입니다. ‘나’는 ‘너’를 모른다.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없다. 이연숙 비평가는 <비(非)우정의 우정>에서 우리가 서로 모른다는 사실에서 출발하는 우정 관계의 예시로 저자와 독자의 관계를 이야기하며, 저자와 독자 사이의 “헛발질”이라는 한시적으로 형성된 공동 감각을 우정으로 명명하며 “전유”합니다. 저자와 독자의 불확실한 공동 감각이 우정이 될 때, 독자와 독자가 느끼는 ‘배출’이라는 공동 경험은 어떤 관계의 시발점이 될 수 있습니까? 그리하여 책 읽기는 ‘우리’의 무엇이 될 수 있습니까?
12월 7일 광주시민 4차 총궐기대회에서는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언급하는 참여자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색색으로 빛나는 가수의 야광봉 대신 《소년이 온다》를 흔들었습니다. 모두 그 책을 읽고 각자의 방식으로 씹어 삼키는 고통의 감각을 이야기했습니다. 한강 작가는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자 강연에서 “독자들이 이 소설을 읽으며 느꼈다고 고백해 온 고통”이 책의 저자로서 자신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음을 언급했습니다. 그 고통이 사랑이 존재함의 증거가 되지 않을까 묻습니다. 왜 광주 집회 참여자들이 한강 작가의 책을 흔들고, 《소년이 온다》를 읽었다는 고통스러운 고백을 하게 되는지 고민하다, 책 읽기라는 공동 경험이 우리의 몸을 5.18 민주광장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저는 눈앞에서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하는 모습을 봅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광장으로 끌어내는 모습을 봅니다. 우리가 ‘우리’가 되는데 필요한 일은 물리적 공간에 실재하는 몸, ‘책 읽기’를 행한 고통에 수치스러웠던 몸들의 마주침입니다. 고통을 동력 삼아 광장에 존재하는 몸들은 분열된 채 서로를 인식합니다.
‘너’가 있습니다. 그 광장에는 ‘은숙’이 도청 민원실에 물을 잠가달라고 전화하던 그 분수대 옆에 ‘축 성탄’ 네온사인이 달린 크리스마스트리가 있습니다. 크리스마스트리 앞에는 여러 단체의 깃발이 있습니다. 우산이 있고, 피켓이 있고, 내가 있고, 소설이 있고, ‘은숙’이 있고, 시체가 있고, 1980년 5월이, “학살”이, “고문”이, “강제진압”이, 비상계엄이 있습니다. 죽은 자가 있고, 산 자가 있고, 현재가 있고, 과거가 있고, 미래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고통과 수치가, 치욕과 분노가 한 덩어리로 있습니다. 글쓰기가 세상에 대한 소극적 저항이라고, 끊이지 않는 질문이라고, 해결되지 않는 의심이라고 할 때, 책 읽기는 인간됨을 증명하는 고통을 겪으며 ‘다름’을 상정한 ‘우리’의 엉성하고 허술한 공동체 만들기입니다. 녹지 않은 결정들로 가득한 탁한 혼합물의 불쾌를 견디며 ‘우리’는 만나야 합니다. 그 불쾌가, 당장 씻어내고 싶은 진득함이, 눈을 돌리고 싶게 만드는 역겨움이 사랑의 반증이라고 믿으면서 ‘독자-나’는 ‘독자-너’를 모르는 ‘독자-우리’를 만납니다. 그렇게 ‘우리’는 책을 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