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하니 집 앞 카페테라스에 앉아 하늘과 아스라이 맞닿은 높다란 건물들을 올려다본다. 정형화된 빌딩 숲속은 어떤 비정형의 속삭임들을 품고 있을까? 우리의 삶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퍼스트 크리스천 교회처럼 '대칭 속의 비대칭'을 내포한다. (물론 그것이 고전주의 시대의 종교와 모더니즘 건축 양식인 퍼스트 크리스천 교회 사이의 충돌을 의미할지 모르지만)
영화의 배경이 되는 로케이션은 미국 인디애나주 중남부에 있는 ‘콜럼버스’라는 도시로 현대 건축물의 메카라고 불린다. '코고나다' 감독은 건축가 ‘아돌프로스(Adolf Loos)’의 ‘장식은 죄악’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모더니즘 건축물의 특징이 잘 녹아 있는 콜럼버스의 모습을 영화를 통해 보여준다.
영화는 두 인물 ‘케이시(헤일리 루 리차드슨)’와 ‘진(존 조)’을 통해 건물을 짓듯 차곡차곡 서사를 쌓아간다. 어렸을 때부터 콜럼버스에 살면서 지금은 사서로 일하는 케이시와 건축과 교수의 아들 진, 그는 아버지가 콜럼버스에 강연을 왔다가 갑자기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한국에서 콜럼버스로 오게 되고 우연히 케이시를 만난다. 둘은 가족을 통해 겪은 아픔을 공유하며 각자 다른 의미로 콜럼버스와 그들의 삶을 마주한다.
대칭적으로 보이는 두 인물은 알고 보면 상당히 비대칭적인 면을 내포한다. 케이시는 과거(마약 복용과 10대 아이들과 사랑을 나누는 그녀의 엄마, 케이시의 말에 따르면 엄마는 쇼타 콤플렉스로 보여진다.)의 상처로 콜럼버스의 모더니즘 건축물에 심취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케이시는 엄마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하다. 그녀는 엄마와 한 시라도 연락이 안 되면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며 그런 불신은 그녀를 새로운 길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괴리가 되고 정형적이며 체계화된 모더니즘 건축물을 향한 학구적인 애정으로 비롯된다. 또한 도서관 사서 역시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오차 없이 틀에 맞춰진 책들 속에서 그녀의 삶 또한 책처럼 각자의 위치에 맞춰 자리를 차지해 나가길 바라는 마음의 비유인 것이다. 이러한 욕구는 그녀의 집에서 역시 찾아볼 수 있는데 콜럼버스의 모더니즘 건축물과 정반대로 그녀는 다소 정형화와 동떨어진 도시 변두리 주택에서 산다. 그녀는 집안의 장식물과 쿠션의 위치를 무의식적으로 정리하는 모습을 보인다.
반면 진은 건축과 교수인 아버지의 부재(건축에 대한 열망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가 그에게 준 상처 때문에 건축에 대해 무관심하다. 하지만 콜럼버스에서 케이시를 만난 뒤, 그녀가 콜럼버스의 모더니즘 건축물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며 그녀의 이야기에 궁금해하고 차츰 그녀와 가까워진다. (어쩌면 그녀가 건축물에 쏟는 애정과 사연들을 통해 진은 그의 아버지를 이해하고자 했을지 모른다. )
사실 그 조차도 자신의 삶 속에서 길을 잃은 방랑자다. 대학교에서 하던 공부를 접고 서울에서 책을 번역하는 일을 하며 자신의 일에 대한 즐거움이나 만족을 찾지 못 하던 도중 콜럼버스에 오게 된 것이다. 그는 케이시와 반대로 틀에 갇혀있는 사람이다.(케이시는 자신의 삶 속에서 틀을 만들고자 한다.) 카메라 속의 그는 시종일관 네모로 정형화된 틀 속에서(문이나 벽에 걸린 거울) 두리번거리고 샤워하는 장면에서는 마치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혹은 그를 가두는 벽들을 밀어내며 고뇌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그는 정형화된 모더니즘 건축물 속에 지내면서 쿠션과 자신의 물건들을 어질러둔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야 한다는 관습과 불확실한 자신의 미래라는 틀로부터 달아나고 싶은 그의 열망을 비유한 것이다.
케이시는 비대칭적인 삶 속에서 대칭을 이루고 진은 대칭적인 삶 속에서 비대칭을 만든다.
각자의 삶을 마주하는 방식이 극명하게 다르다. 하지만 영화 속 진과 케이시는 각자의 아픔을 공유하고 응원하며 치유하는 과정을 겪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관객 역시 닮은 듯 다른 그들의 관계에서 일종의 치유를 얻는다. 마치 진이 케이시에게 설명해주는 '제임스 폴섹'이 한 '건축물은 사람들을 치유한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듯 보인다. 관계의 구조 자체가 아니라 관계가 가지는 의미가 우리를 치유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타인의 이해를 통해 위안을 받고 치유될 수 있는 것은 각자 다른 삶과 생각, 사연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완벽한 이해가 아닌 이해를 위한 노력, 그 마음이 와닿아 상처를 아물게 하고 넘어진 이들을 일으켜 세워줄 따뜻한 손이 되는 것이다.
콜럼버스의 모더니즘 건축물로 가득한 영상 속에서 진과 케이시의 관계는 모더니즘 자체가 아닌 모더니즘으로 향한 열망을 표현된다. '먼로우 스피어스(Monroe K. Spears)'의 말에 따르면 심미적 모더니즘이란 ‘일종의 해방이요, 인습의 손아귀에서 그리고 진부한 경건함과 제약에서 벗어나려는 유쾌한 해방이다.’ 한 마디로 모더니즘은 관습적으로 내려온 심미적 권위나 인습을 거부하며 단절하고자 하는 것이다. 진과 케이시 역시 같은 열망을 가지고 있다. 진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아버지의 임종을 끝까지 지켜야 할지 고민하고 케이시 역시 어머니를 둔 채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떠나야 할지 고민한다. 하지만 케이시의 가능성을 본 진은 그러한 그녀의 열망에 불을 지펴 그녀를 세상 밖으로 나아가게 하는 반면, 자신은 결국 나아가지 못 하고 콜럼버스에 머무른다. 케이시는 자신이 만든 틀을 깨고 나아가지만 진은 반대로 자신이 들어온 틀 속에 갇혀 버리고 만다. 결국 둘의 거리는 좁혀지지 못 한 채 (영화 속 내내 둘은 쇼트와 쇼트 사이에서 떨어져 있으며 차를 사이에 두고 대화를 하거나 나무로 된 터널을 지날 때 역시 둘은 갈라서게 된다.) 헤어지며, 마지막 위안의 포옹만이 유일한 둘의 교집합이 되는 셈이다.
잔잔하고 단순한 듯한 영화지만 인물의 관계는 상당히 짜임새 있으며 카메라를 고정시켜 촬영함으로써 건축물들을 조용히 감상할 수 있게 해주는 방식이 독특했다. 마치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느낌이다. 덕분에 다양한 관점에서 영화를 즐길 수 있으며 영상의 움직임이 아닌 편집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또한 1점, 2점, 3점 투시도법(원근법)을 활용하여 영상에 입체감을 더 하였다.
영화 <콜럼버스>는 코고나다 감독의 첫 데뷔작인 동시에 신인 감독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개성이 뚜렷해 앞으로가 더욱 주목되며 궁금하게 만드는 감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