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채채 Apr 10. 2021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 하고 싶어서

죽음을 옆구리에 끼고 사는 사람들에게

 덜컹, 덜커덕, 덜덜덜덜. 돌덩이 틈새에 몸을 부대끼며 굴러가는 캐리어 바퀴 소리를 들으며 프라하 중앙역으로 들어선다. 플랫폼에 서서 빈 속에 카페라떼를 들이부으며 곁눈질로 주변을 훑어본다. 왼쪽으로는 목에 카메라를 매달고 한껏 꾸며입은 여자 두 명이 서있고, 오른쪽으로는 펑퍼짐한 후드집업에 머리에는 커다란 헤드셋을 낀 남자 한 명이 보인다. 역무원의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면 스피커를 향해 고개를 휙 돌리고, 저 멀리서 기차가 유유히 다가오면 몸통을 좌우로 흔들며 몸을 길게 빼보이는 모양새가 한 무리의 펭귄같다.



태연한 해골이 주는 용기


 잠시나마 내적 친밀감을 느꼈던 이들이 기차에서 내린지 한참이 지나서야 쿠트나 호라 Kutna Hora에 도착했다는 방송이 나온다. 기차에서 내려 역사를 빠져나와 앞으로만 걷다보면, 한 성당이 나온다. 그리고 성당 초입에는 까맣게 침전한 눈동자를 한 해골들이 나를 반긴다.

 다른 성당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이 성당에도 있다. 샹들리에, 기둥 장식, 십자가. 차이가 있다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죽은 사람의 유해라는 것뿐. 천장에 매달린 수 백개의 머리통이 백열전구처럼 성당 안을 환하게 비춘다. 햇빛이 하얀 해골에 반사되어 성당 안이 밝다. 무덤 속이나 유골함이 아닌 도시 한 가운데 태연하게 버티고 선 백골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아침 댓바람부터 죽음을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처음 조문을 갈 때 검정색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 외에는 아는 게 없었다. 장례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장례엔 뭐가 필요한지, 상주는 어떤 일을 하는지, 한껏 속상한 표정을 짓고 있어야 하는지, 아무렇지 않은 척 빤한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하지만 결혼식은 참석해본 적도 없었으면서 스드메, 예물, 폐백, 신부대기실 따위를 나도 모르게 줄줄 꿰고 있더라. 매체에서도, 일상 속에서도 모두가 죽음은 쉬쉬하고, 탄생은 찬양하고 있었다. 그게 참 불편했다. 쉬쉬한다고 해서 사람이 죽지 않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양지바른 곳에 모여 '나 여기 있어요'하고 외치는 이 해골들을 보니 용기가 생긴다. 이 성당처럼,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끄내어 낱낱이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죽음이 모두에게 당연하기를


 지구본을 멀찍이서 바라보며, 한치의 오차도 없이 탄생과 같은 양 만큼의 죽음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다. 아무 일 없어 보이는 한 사람의 하루에 죽음이 아무렇지 않게 자리를 잡고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고 싶은 거다. 매일 엄마의 죽음을 쓰고 있지만, 평소의 나는 잘 웃고, 잘 먹고, 잘 자고, 자주 행복하다. 시간이 지나서 괜찮아진 게 아니냐고 묻는다면 정확히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다가도 때로는, 엄마의 죽음을 처음 들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 정확히 그 순간처럼 무너지니까. 다만 한 살 두 살 먹으면서 상처를 감당할 수 있는 내 품의 크기가 조금 커진거라 믿는다. 엄마가 세상을 떠났을 땐 겨우 100밖에 안 되는 내 품에 150만큼의 비애가 담겨 감당할 수 없었다면, 품의 크기가 점차 200, 300의 크기로 커진 거다. 그래서 이젠 죽음을 온전히 끌어안고 있어도 바깥으로 흘리지 않고 태연하게 서있을 수 있다.

 성당을 나와 이제 막 자리를 깔기 시작한 크리스마스 마켓 사이사이를 캐리어 바퀴처럼 굴러다닌다. 겨울이 되면 12월은 오지도 않았는데 시가지 여기저기에서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린다. 명절이나 다름없는 크리스마스를 즐기러 나온 가족들로 마켓이 북적인다. 엄마와 딸이 팔짱을 낀 채, 사지도 않을 가죽 공예품을 구경하는라 뒤처진 아빠를 재촉한다. 한 젊은 부부가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걸어가고 양 옆으로는 둘을 쏙 빼닮은 아이들이 츄러스를 하나씩 입에 물고 걸어간다. 그 사랑스러운 장면을 보고있자니 슬쩍 미소가 번진다. 이러다도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엄마의 죽음을 실감하고, 엄마와 보냈던 시간을 곱씹어보다, 죽음을 쓰고 있을 거다. 하지만 이제 내겐 죽음과 동거하는 일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 됐다. 나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죽음은 당연한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죽음을 옆구리에 끼고 살아가는 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쓴다. 별 일 아니라는 듯 이승에 자리잡은 해골들이, 내게 이 글을 쓸 용기를 줬던 것처럼.

이전 09화 야근을 한 날엔 녹음파일을 듣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