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색 머리로 출근하기
탈색하고 출근하다 대표님을 만났다
내가 탈색을 시작한 계기는 모 회사에 다니던 시절, 사장님의 소개팅 제안 때문이었다. 당시 사장은 50세 싱글남이었는데, 결혼을 간절히 원했으나 매번 실패로 돌아가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그가 결혼을 못 하는 이유가 분명했으나 자기만 모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주변엔 비슷하게 결혼을 하지 못한 싱글남들이 많았다. 당시 20대 후반이었던 나는 남자 친구가 없었다. 문제는 내가 남자 친구가 없다는 걸 알게 된 그가 자꾸만 소개팅을 주선하려 했던 것이다.
"내 후배가 한의사인데 말이야~ 진짜 사람이 진국이거든? 이보나 너 한번 만나볼래? 그쪽도 괜찮다는데..."
아니, 이 사람아. 내가 괜찮지 않았다. 사장 후배라면 적어도 40대 후반일 텐데, 이 무슨 소개팅하다가 쌈 싸 먹는 소리란 말인가. 나는 사장이 문제의 소개팅을 언급하기 시작한 이후로 바로 미용실로 달려갔다. 당시에는 머리가 매우 길었는데, 귀 아랫부분까지를 탈색한 다음 보라색으로 물들여 버렸다. 내 생의 처음 탈색이었다.
그렇게 소개팅을 피하려 시작한 탈색은, 이후로 스트레스 해소의 한 방법이 되었다. 나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머리색을 바꿨다. 내 투톤 머리는 보라색이 되었다가, 핑크색이 되었다가, 빨간색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새로운 회사에 들어가며 머리를 미디엄 기장으로 자르고 얌전히 갈색 머리로 바꿨다. 하지만 본래 내 안에 존재하는 탈색 욕구는 자꾸만 꿈틀거리며 이성을 비집고 나오려 했다. 회사에서 업무 스트레스가 강해질수록 탈색 욕구 또한 강해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팀장님께 여쭤보았다.
"혹시 회사에... 복장 제한이라든가. 두발 제한... 뭐 그런 게 있나요?"
"아뇨 없어요. 아프로펌을 하고 와도 상관없어요. 본인이 조금 창피할 뿐이죠."
팀장님의 쿨~한 대답에 나는 그날 바로 미용실로 달려가서 외쳤다.
"전체 탈색하고 핑크색으로 염색해 주세요!"
그렇게 나는 영롱하고 아름다운 baby핑크 컬러 머리를 하고 다음날 출근하게 된 것이다. 솔직히 내가 봐도 너무 파격적이었다. 마치 금요일 밤 홍대나 도쿄 이케부쿠로에 가면 볼 수 있을 듯한 머리스타일을 파주 구석탱이에 하고 나타나다니....
출근 첫날부터 본부장님과 입구에서 마주쳤다. 본부장님은 내 머리를 보고 눈이 축구공만 해지더니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ㄴ...느....느ㅓ.... 머리.... 히익!"
그날 모든 사람들이 날 보고 비슷한 반응을 보였는데, 대부분 '머...므....머리... 히익!' '히이익 ㅁ..므어리...!' 같은 반응이었다. 물론 너무 예쁘다고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내 상상이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대표님을 언제 만나느냐였다. 나는 왠지 찔려서 최대한 오랫동안 대표님을 피해 다닐 생각이었다. 원래 이렇게 생각하면 바로 만나게 되는 법. 그날 점심시간에 횡단보도 앞에서 바로 대표님과 만나게 되었다.
대표님은 횡단보도 바로 앞에 서 있었고, 나는 그런 대표님을 멀리서 발견하고 주춤주춤 걷고 있었다. 핑크머리의 인기척을 느낀 대표님이 뒤를 돌아보았고, 우리는 피할 겨를도 없이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마주치는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난 알아요....
"자....자네...."
".... 안녕하세요 대표님?"
"....자네....허..."
대표님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다시 앞만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ㅈ.....ㅈ..즈아네..."
"네, 대표님."
"허...."
대표님은 내 머리를 보고 이 세상의 모든 말을 잃어버리기라도 한 듯 '자네'와 '허'만 반복해댔다. 하지만 '머리색을 다시 바꾸라'거나 '자네 정신이 있냐 없냐'처럼 비난의 말을 하진 않았다. 조금 충격적이긴 해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놔둔 것이다. 그리고 몇 달 후, 회식자리에서 대표님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말이야... 자네 혼자 우주로 가고 있어! 이 회사에서 자네 혼자 우주로 가고 있다고!"
나는 그런 대표님의 말씀을 'ㅇㅅaㅇ' 이런 표정으로 들을 뿐이었다. 내가 혼자 우주로 가든 말든, 내 머리색이 내 업무 효율을 낮추는 것도 아니었고, 대표님은 끝까지 머리색을 바꾸라 말라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퇴사한 먼 훗날, 나는 대표님이 이런 말을 했다는 걸 동료에게 전해 들었다.
"사실, 그때 보나 씨가 머리 염색한 거 보고 대표님이 좋아하셨대."
"왜요?"
"회사에 저런 도라이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맞는 말이다. 어디에나 똑같은 사람들만 있으면 얼마나 재미가 없을까? 세상에는 도라이가 한 명씩 섞여 있어야 재밌는 법이다. 나는 오늘도, 다음엔 무슨 머리를 할까 고민한다. 물론 지금은 단정한 검은색 머리에 숏컷 스타일이긴 하다. 하지만 모를 일이다. 당장 내일 초록색으로 머리를 염색해버릴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