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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력 Nov 11. 2024

육아를 글로 배우다. (완결)

나의 어린시, 아버지는 놀랄정도로 말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내가 아홉살에 집을 나가셨다. 나는 제대로 된 양육을 본 적도 배운적도 없다. 늑대에게 키워진 모글리 정도는 아니지만 뼛속 깊이 각인된 무관심과 폭력의 유전자가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자아성찰도 아이를 키우면서 하게 된 것이다. 그전에는 나는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인줄 알았다. 나의 대해 과신(?), 과대포장하고 있었다. 굉장히 의롭고 착한 사람이라고 착각했다. 결혼 전에 아이를 낳기전에는 이런 과신이 먹혔다. 나만 잘하면 그럭저럭 삶을 영위했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자녀를 키우며 나의 부족함을 어마어마하게 깨닫게 된다.


나는 육아를 글로 배웠다. 사람의 성장에 대해 무지하니 나름 공부를 했다. 무엇을 깨치는 능력은 있으니 책을 읽으며 알아뒀다. 그즈음 보육교사를 공부할 기회가 있어 육아에 대한 공부를 했다.


나는 자신감이 있었다. 나에 대한 과신...


아이들을 키우며 나는 내가 가진 모든 재능이 쓸모 없구나 알게 되었다. 아이들은 내 맘데로 키워지지가 않았다.


그야말로 육아 삽질(?)을 장장 이십여년을 하고나서야 나는 죽을 때까지 노력해야 되는 사람이구나 알게 됐다.


사람은 보고 배운데로 자기 몸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나에게 인이 박힌 가정환경의 못된 배움이 부지불식간에 그대로 재현되니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화가나면 화를 터트리고 분노하고 때리는 방식만 배웠다. 나는 안그럴줄 알았는데 내 몸이 먼저 반응했다. 나는 그것이 옳다는 확신이 있었다.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화가 나면 때리고 파괴하는 방식이 아닌 대화의 방법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비폭력대화를 배우고 알게 된 것이다. 아니 알고 있었지만 실천하지 못했던 좋은 방법을 하나 하나 바꿔 나갔다.


부모에게 받은 역기능의 양육방식과 소통 능력이 뼛속 깊이 각인되서,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기 전에 부지불식간에 나왔다. 


비폭력 대화에는 그것이 있다. 부지불식간에 이뤄지는 나의 반응의 결과를 바꾸는 것이다.


비폭력 대화는 부지불식간에 반응하는 나의 태도와 말을 비폭력적으로 바꾸는 일이다.


이 글을 쓰며 지나온 나의 과거를 생각하면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다. 나를 용서하기 힘들다. 그래도 아이들을 위해 살아야 하기에 나의 잘못에 대해 발가벗긴 것이다.


나의 글은 육아에 촛점이 맞춰있지만 이유가 있다. 이것에 성공한다면 다른 인간관계는 비교적 쉽기 때문이다. 그 만큼 가족갈등이 어렵다고 생각한다. 최상의 난이도가 가족이다.  


그 이유는 밖에서는 내가 최상의 얼굴로 가면을 쓰고 사람을 대할 수 있지만 가족에게서는 민낯의 나로서 살기 때문에 나의 적나라함이 여지없이 드러난 곳이니 어렵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가족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가족을 해결하면 밖에서의 사람은 비교적 쉽다는 것이다.


이 글은 나처럼 부모에게 제대로된 인성의 유산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 꼭 필요하다. 나는 이것이 없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노력하고 죽을 때까지 실패와 성공을 반복할 것 같다. 최근에 그나마 성공률이 높아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 내놓게 됐다.





폭력의 뜻 : 남을 거칠고 사납게 제압할때 쓰는  물리적인 수단이나 힘.


나는 비교적 착한 사람인데 이런 걸 알 필요가 있나 생각했었다. 그런데 사전에 나온 이 물리적인 것만 폭력이 아닌것이었다.


내가 비폭력대화를 배우고 내린 폭력의 정의는 이렇다.


폭력 :  상대방에게 가하는 내적, 외적 외상을 주는 행위의 모든 것.  더불어 그것이 회복기간이 필요 한 모든 것을 말한다.


이것에 대한 정립이 중요한 이유는 내가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나쁜 습관들을 고치기 위해서이다. 내가 한 것들이 폭력일 수도 있다는 인지와 의심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폭력에 대한 인지와 의심을 자각해야 변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우리가정은 갈등이 일어나면 파국을 맞았다. 누구하나가 상처 받고 전쟁이 지나간 폐허처럼 아프기만했다. 이 전쟁의 승자는 아무도 없다.


나는 간절히 화목한 가정을 원했건만 그것은 수학 문제보다 어려웠다.


비폭력대화는 갈등의 결과값을 바꾸는 것이다. 상대의 변화와 협조를 이룩하는 것이다. 나도 살고 너도 사는 모두가 승리자가 되는 방법이다.


갈등은 보통 상대의 자극으로 시작된다. 나는 좋은 부모에게 좋은 대화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늘 하던 방식으로 대응하니 갈등은 파국의 공식이 성립된 것이다.


어떤 대화가 시작 될 때 우선은  몸을 살펴야한다. 나는 지금 지극히 '보통'의 안온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가이다.


그것은 똑같은 기분 나쁜 자극이 주어졌을때 나의 상태에 따라 반응이 다르기 때문이다.


내 몸이 원하는 것을 충족한 후에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배고플 땐 뭘좀 먹고, 졸릴 때 자고, 피곤할 땐 쉬고, 바쁠땐 바쁜것을 해결하고, 아플 땐 치료하고 대화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해결이 되지 않고 대화를 하면 나의 반응이 과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것을 잘 자각하기가 힘들다. 내가 아픈지, 피곤한지, 평소에 나를 살펴보야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상대방도 위의 것이 충족되지 않을 때 과하게 반응한다.


이미 과하고 신경질이 가득한 상태에서는 대화하기 힘들다.  


그러니 평소에 나의 행복지수가 높아지는것에 집중하다보면 내가 비교적 여유롭기 때문에 너그러운 대화가 가능할 것이다.


나를 잘 입히고, 먹이고, 휴식하고, 재우고, 돌봐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 쉽기도 한데 생각보다 자기자신이 뒷전인 경우가 많다. 가정을 돌보는 주부인 나도 그랬다. 나를 제일 대접을 안했더니 뭔가 분하고 억울한 상태에서 가족을 대하니 가족은 영문을 알 수 없는 폭탄을 맞는것이다.


나를 위한 돌봄, 나에 대한 공감을 할때 비로소 비폭력대화가 가능하게 된다. 원만한 소통의 길로 갈 수 있다.  다른 것은 잊어버려도. '나에 대한 돌봄'하나만 기억해도 된다.




씹고, 뜯고, 맛보는 비폭력대화는 여기가 완결입니다. 생각보다 밑천이 금방 바닥이 났답니다.


비폭력 대화 공부덕에 나를 알고, 나에 대해 돌봄을 시작했으니 저는 목적 달성을 했답니다.  


기회되면 비폭력 관련 책을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갈등의 실마리가 풀린답니다.

 

이야기 거리가 있을 때 다시 돌아오려고요. 항상 건강하시고 나 먼저 돌보기 잊지 맙시다. 저도 그럴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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