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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력 Oct 28. 2024

나는 다른 사람을 조정하려 했다.

나의 타인 통제 욕구를 감지하다.

비폭력 대화를 배우고 나의 욕구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특히 나의 욕구는 갈등이나 마음속에 번민이 있을 때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 실마리가 풀리고 나의 고민이 작아진다.


최근에 아주 미묘하게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 누구한테 말하기도 뭣한, 아주 신경이 거슬리고 생각을 하게 되는 그런 일이었다. 왠지 내가 말하기에는 쫌생이가 될 것 같아 마음속으로만 번민하고 가시처럼 가지고 있던 일이다.


물론 사람과의 관계의 일이다.


나는 어느 단체에 소속되어 있다. 그중에 A부부가 있다.  이 부부는 아주 훌륭하신 분이다. 아이들도 잘 키웠고 부모한테도 잘하고 우리 단체에 물질도 잘 지원한다. 다른 사람한테도 베푸는 성격이다.


그런데 말이다. 나는 이 A남편에게 투명인간이다. 겨우 이십 명 남짓한 이 단체에서 A남편은 나랑 말을 아예 하지 않는다. 인사도 안 한다. 그냥 보면 쓱 지나친다. 모든 사람에게 그러면 그런가 보다 하겠는데, 다른 사람한테는 살갑고 시끌벅적 대화도 잘한다.


나하고만 말을 섞지 않는다. 꽤 오래됐다. 5년 이상됐다.   


이상했다.


'나를 싫어하나?'  (인지 왜곡이다. 확인되지 않았다.)


A부부는 그들이 선호하는 사람들에게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저 사람은 인간성이 훌륭해." 이런다.


그럼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인간성이 부족한 사람인가?' 생각한다.


최근에 그분이 살짝 조금 다쳤다.  나는 아는 체를 하고 걱정을 해줬다. 그런데 정말 그전까지 사람들과 대화를 했었는데 내 얘기는 들었는지 말았는지 그냥 쓱 가버린다.


그때부터 인 것 같다. 그때 내 마음속에 불꽃이 재점화가 된 것이다.


집에 돌아와서 한참을 생각했다.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지?'

'물어볼까?'

'친하게 지내자고 할까?'


그동안 그 남편이 나를 무시(내 기준에)했던 행동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빴다. 신경이 쓰였다.


참 이게 말하기도 뭣한 미묘하게 좀스러운 일의 쌓임이었다.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지?'

'내가 뭐 실수했나?'


상대가 그러면 나도 똑같이 대해주면 된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면 된다. 나도 똑같이 그렇게 지내긴 했다. 그런데 괜히 다친 에 관심을 가지고 아는 체를 했다가 상대의 투명인간 취급만 한번 더 경험한 것이다.


상대가 딱히 잘못한 것이 없으니 미워하기도 그렇다. 워낙 명망 있는 부부라 그 원인을 나에게서 찾기도 했다.


내 마음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얄미웠다. 서운했다.


얄미워하는 내 감정을 인지하고 왜 그런가 생각해 보았다. 질투심 때문에 얄밉나? 이건 왜 그렇게 생각했냐면 워낙 좋은 가정을 건사하는 두 분을 마음속에 부러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질투의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번민이 해결이 안 됐다.  나는 질투심이 별로 없는 사람이다. 잘 못 짚었다. 그것도 아니었다.


가장 큰 감정은 '얄미움'이었다. 얄미웠다. 얄미움이 커지니 꼴 보기 싫어졌다. 그 단체에 나가기 싫어졌다.  전혀 이성적이지 않은 생각이다.


'왜 밉지?'  


나는 왜 얄미운지 내 마음속을 계속 들여다봤다.  


생각 끝에 나는 인정욕구가 있는 사람이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란 것을 알았다.  그러니 그 욕구가 해결되지 않으니 화가 난 것이다.


나는  조커의 가면을 하고 사람들에게 맞춰주고 사랑받은 적이 많다. 내 욕구는 무시하고 상대를 맞춰주면, 잘해주면, 관심을 가지면, 대부분 좋은 피드백이 돌아오는 경험을 했다.


그 행동 뒷면은 이런 것이 있다.


'나를 인정해 줘.'

'나를 사랑해 줘.'


그렇게 부지불식간에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내편으로 만든 것이다. 나도 모르게 잠재의식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조종한 것이다.


손 하나 안 대고...  그저 친절함과 관심만으로 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조종을 한 것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나의 인정욕구의 발현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마음대로 안되니 그 부부가 얄미웠던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정한 데로 사람들과 거리를 둘 수 있다. 그 부부는 그저 자신이 편한 데로 나와의 거리를 둔 것이다.  


인정욕구가 고픈 나만 안달복달 북 치고 장구치고 혼자 상처받고 한 것이다. 


'내가 타인의 감정을 바꿀 필요가 있을까?'

'나는 왜 그들 마음에 들려고 노력할까.'  

이것이 조정이고 통제욕구란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마음이 나를 좋아하도록 하는 것 말이다.


그건 그 사람의 자유이다. 그 사람의 영역이다.


해결되지 않은 인정욕구로 나만 마음속에 번민으로 힘들었던 것이다.


내 맘대로 조종되지 않는 상황에 화가 난 것이다.


누구와 거리를 두던, 가까이 두던 그 사람의 자유의지이다. 나는 맘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기분이 나빠진 것이다.


내가 되게 웃기다.


왜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할까.


욕심이다.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기분 나쁜 게 며칠이 계속됐는데 나의 감정을 인지하고 나서 얄미운 감정이 많이 줄었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뭐 한 번에 되겠나 싶다.


큰애 6학년 때 수학을 어려워해서 나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나는 수학을 싫어한다. 젬병이다. 무엇을 가르치는 능력에는 자신이 있으니 답안지를 보고 유추해 내서, 큰애가 가장 알아듣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 줬다.


큰애는 이렇게 말했다.


"와~ 엄마가 선생님보다 잘 가르친다. 귀에 쏙쏙 들어온다~.' 그랬다.


큰애는 내가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개를 알아냈다. 그 후로도 큰애는 항상 엄마가 잘 가르친다고 했다. 큰애는 나에게 수학, 피구, 음악등을 배우며 가르치는 보람이 들게 잘했다.


나는 내가 되게 잘 가르치는 줄 알았다.


나는 아이가 네 명이다. 그 후로도 아이들에게 자신만만하게 무엇을 가르쳤다.  그중에 한 애가 말했다.


"엄마는 왜 그렇게 설명을 못해. 우리 선생님보다 못 가르쳐." 했다.


나는 똑같이 가르쳤는데 아이들의 평가는 극명하게 달랐다.


상황 따라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르다.


그러니 어떤 장소든 어느 단체든  내가 싫을 수도 있고 거리를 두고 싶은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사람맘은 다 제각각인데 나는 인정받기 위해 과도하게 신경 쓰고 노력을 한 것이다.


어쩌면 나는 나를 싫어하는 그 마음을 바꾸고 싶었나 보다. 간접적인 통제욕구이다.


그게 어디 내 맘 데로 되는가.  상대도 불편했겠다. 거리 두고 싶은 마음을 내가 자꾸 훅훅 침범하니 말이다.


나는 타인의 그런 마음을 그냥 두기로 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뺏기는 나의 에너지를 거두고,  나는 지금 캘리 연습을 한다. 공부를 한다. 책을 읽는다. 놀러 다닌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고 가정일을 건사한다.


나의 인정욕구를 채우기 위한 과도한 에너지를, 나를 위한 시간으로 채워 나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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