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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력 Oct 21. 2024

조커의 가면을 벗어던지다.

나도 헷갈리는 나의 모습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쯤인가 성격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일생일대의 '선택'이었다.


나는 본래 수줍음이 있고 낯을 가리는 성격이다. 내성적인 면이 어느 면에 자리 잡고 있었다.  활발하고 밖을 좋아하는 아이였어도 까탈스러움도 있는 아이였다.


나는 누가 먹던 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던 아이였다. 그리고 곁을 잘 주는 성격이 아니다. 좀 자기 잘난 맛이 있어 도도한 면이 있는 아이였다.


어느 날 학교 쉬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화장실도 가고 친하게 지내는데 나는 혼자였다. 학교에는 물고기가 사는 작은 호수가 있었다. 점심시간에 딱히 놀 아이가 없어 호수로 갔다

나는 호수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겨울이라 물도 없고 물고기도 없었다.  말라비틀어진 호수를 바라보며 가슴이 공허함을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왜 친구가 없지? 내가 문제인가?'


나는 원인 분석을 해보았다. 도도하고 자존심 센 성격이 문제인 것 같았다. 그리고 자존심을 버리고 친구들과 잘 지내기 위해 나의 성격을 바꾸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날부터 결심을 한 것이다.  지금의 나와 르게 살기로..  


어느 날 한 아이가 막대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그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내 쪽으로 내밀며 말했다.


"너도 먹을래?"


아이스크림은  그 아이가 어 먹어, 먹던 것이었다. 나는 그 아이가 내민 아이스크림을 보며 갈등했다.


'먹을까? 말까?'


평소 아이들이 스스럼없이 그렇게 친해지는 것을 보아왔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두 눈 딱 감고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었다.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이었지만 먹던거라 입 안에서 오물오물 먹기는 먹었다.

별거 아니었다. 아무렇지 않았다. 괜찮았다. 친구는 흡족하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뭔가 우리는 거리가 가까워진 것 같았다. 참 희한했다.


그때부터였다. 나는 평소의 나와 다르게 행동했다. 과하게 웃었고, 과하게 장난꾸러기가 됐다. 친구가 많이 생겼다. 나는 친구들의 웃음 담당이 되었다. 조커같이 재밌고 웃기는 사람이 됐다.


집에서의 나의 무가치함이 학교에서 많은 친구들을 사귀며 충족되었다. 나의 이런 성격은 많은 사람에게  환영받았다.


괜찮은 것 같았다. 이렇게 사는 것도...


집에서 아버지의 불함리함을 과도하게 참았다. 살아내야 했으니까. 밖에서는 나는 조커처럼 피에로처럼 사람들을 웃겼다. 그래야 살 것 같았다.


웃을 일이 아닌데도 대범한 척, 마음 넓은 척 나의 부정적 욕구를 억눌렀다. 다행(?)인지 이런 나를 사람들은 좋아했다. 그러니 나의 이런 성격은 더욱 강화되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좋은 모습만 보이려 노력했다. 나의 어둡고 투덜대고 부정적 모습은 감췄다. 부지불식간에 감췄다.


꽤 오랫동안 이렇게 살았다. 웬만하면 참고 웃어넘기는 일이 많았다.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제 그렇게 살기 싫어진 것이다. 나의 내면의 욕구를 철저히 무시한 삶은 나를 고장 내버렸다. 나는 누가 상처 줘도 잘 느끼지 않는 무딘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내면의 정체를 알 수 없는 화와 분노에 압도되기 일쑤였다.  화가 나기는 나는데 왜 화가 나는지 모르는 것이다.


비폭력 대화를 배우며 자신의 느낌 단어를 떠올리는 것을 배운다. 마음상태를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풍선의 바람을 빼는 것처럼 도움이 된다.  자신 안에 있는 화를 누그러뜨릴 수 있다.


감정에 무디니 느낌단어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누가 상처 줘도 며칠이 지나야 내 감정을 알 수 있었다.  


가족 안에서 아이들과의 소통에 문제가 많았다. 내가 내 감정을 모르는데 아이들 감정은 더욱 몰랐다. 아이들과 갈등이 생기면 항상 파국을 맞았다. 전쟁난 폐허처럼 서로 생채기만 남겼다.


나의 망가진 정서가 문제였다.


삶이 고단하고 힘들어지고 절망을 맛보던 시기가 있었다. 더 이상 걸어갈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없던 기간이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이제는 본래의 내 모습으로 살아도 되지 않을까.'


갈등이  생기거나 화가 날 때 또는 어떤 사건에서, 나의 감정을 알아내려 노력했다. 어려웠다. 습관이 안되어 있으니 어려웠다.  


비폭력 대화에서 자신의 감정을 아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자신의 느낌을 알아야 원활한 소통의 단계로 나갈 수 있다.


자꾸 노력하니 이제 조금씩 알아내게 됐다.


나는 지금 조커의 가면을 벗어던진 삶을 산다.  


비폭력 대화를 배우며 나의 욕구와 내면을 들여다본 것이다.


나는 그냥 사람이었다.


여러 가지 욕구가 있는 사람이었다. 


나도 느낌이 있는 사람이었다.


어느 장소에서건 조커같이 행동하는 것은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고 싶은 나의 행동이다.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는 했지만, 나에 대한 배려가 없었던 나를 깨달았다.


나의 내면을 보니 다양한 나의 모습과 다양한 욕구가 있는 사람이었다. 질투심, 미움, 각종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나를 발견했다.


인정받고 싶어서 과하게 참고 배려하고 거절하지 못하는 나를 발견했다. 


조커의 가면을 벗어던지니 편하다. 이제 나는 기분 나쁜 것도 잘 말하고 거절도 잘한다. 내 안의 지금 종 느낌들을 그대로 바라본다. 죄악시하지 않는다.


편하다.


편하다.


화도 낸다. 투덜도 댄다. 각종 부정적 감정도 내어 놓는다.


편하다. 이제 사람들 눈치를 보지 않는다.


아직 완벽하지 않지만 편하다.


내 자신이 건강하고, 정서적 편함이 있어야 원할한 소통의 단계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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