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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리오 Dec 15. 2019

시간을 가꾸는 사람

[영화] 아이리시맨 (The Irishman, 2019)

  양로원 복도를 가로지르는 트래킹숏이 시작되자 마음이 두근거렸다. 그 길 끝에 나올 주인공의 모습이 궁금했고, 그이로부터 펼쳐질 이야기가 기대됐고, 그것을 통해 묻는 질문에 닿을 수 있길 바랐다. 로버트 드 니로와 알 파치노, 조 페시 그리고 마틴 스콜세지. 그들이 뭉친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고조된 설렘은 절정에 다랐다. 그것은 실망할 수밖에 없는 섣부른 기대가 아니라 그들의 시간에 대한 신뢰였다. 영화가 망하던, 흥행하던, 애초에 상관이 없었다. 내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이 한 작품에 모두 나온다는 사실 자체가 환상적이었다. 게다가 넷플리스에서 제작한다는 소식은 달력에 쳐놓은 동그라미를 더 진하게 만들었다. 그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내그 영화를 볼 수 있을 것을 터였다.


아이리시맨 (The Irishman, 2019) 출처 : IMDb


  이 떨림은 친구가 나에게 처음 마틴 스콜세지를 알려주었던 날 밤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는 아파트 계단에 서서 오랫동안 영화 이야기를 나눴다. 친구는 학교에서 배운 것을 말고, 나는 그것을 듣고 기억했다. 그는 특히 마틴 스콜세지를 입이 마르도록 칭송했다. <좋은 친구들>과 <카지노>의 트래킹숏에 미간을 찌푸렸고, <갱스 오브 뉴욕>의 교차편집에 엄지를 치켜세웠으며, <쿤둔>의 버드 아이 뷰에 숨을 죽였다. 그 모습 보는 나도 덩달아 표정과 호흡이 변했다. 친구의 이야기매료된 나는 이미 마틴 스콜세지에 팬이었다. 빨리 그의 영화를 제대로 보고 싶었다.


아이리시맨 (The Irishman, 2019) 출처 : IMDb


  한 남자의 인생이자 미국의 역사를 담은 <아이리시맨>은 마틴 스콜세지가 생각하는 영화에 대한 반추이자 가치의 재현이었다. 디에이징을 통해 극복하지 못한 로버트 드 니로의 둔해져 버린 움직임조차 모두 영화의 메시지와 연관되어있어 보였다. 이야기의 배열과 캐스팅모두 당위성이 있었고, 감독의 목표에 집중되어 있었다. 200분이 넘는 러닝타임은 이 영화에 더할 나위 없이 알맞은 시간이었다.


아이리시맨 (The Irishman, 2019) 출처 : IMDb


  영화에서 디에이징이란 최신 CG 기술을 이용해 재현해낸 로버트 드 니로와 조 페시의 젊은 모습은 정말 놀라웠다. 수십 년에 걸쳐 찍은 영화라 해도 믿을 만큼 감쪽같았다. 그것은 청년부터 노년까지 이어지는 인물의 일대기를 대역 없이 촬영할 수 있게 했고, 배우들의 외형과 연기에 일관성을 불어넣었다. 영화에는 무게감이 생겼고, 완성도가 더해졌다. 물론, 배우들의 나이가 많아 덧씌워진 세월은 아무래도 티가 났다. 로버트 드 니로의 발길질에는 예전보다 박력이 덜 했고, 표정에는 두꺼운 나잇살이 붙어있었다. 함께 공개된 다큐멘터리, <아이리시맨을 말하다>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감독과 배우와 스태프 모두는 이러한 문제를 인지하고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더 나이가 적은 내가 보기에 세월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것은 마치 얼마 전 대학교 도서관에서 내가 느낀, 어쩌면 그곳에서 나의 모습을 본 대학생들이 느꼈을 차이처럼 불가항력적인 순리였다.


아이리시맨 (The Irishman, 2019) 출처 : IMDb


  찾아볼 책이 있어 오랜만에 대학교 도서관에서 간 나는 감회에 젖었다. 철없이 뛰어놀던 곳에 있으니 기분이 들떴고, 학생들에 둘러싸여 있으니 그 나이로 돌아간 것 같았다. 지난 사랑과 우정을 추억했고, 장난기 많던 자신을 그리워했다.

  그러다 화장실에 갔을 때,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조금 전까지 상상하던 내가 아니었다. 스스로 겉보기에 대학생들과 별로 차이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군대에 다녀온 복학생보다, 논문에 찌든 대학원생보다 훨씬 더 나이 들어 보였다. 이후 나는 원래 하려던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전까지 있었던 감흥도 모두 사라졌다.

  당황한 나는 다음 날 바로 옷을 사러 갔다. 아무렇게나 기른 수염을 면도 하고, 쓰지 않던 화장품으로 얼굴을 덮었다.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어지간한 것은 다 했다. ‘이 정도면 됐어!’ 며칠 뒤, 나는 다시 학교 도서관에 갔다. 하지만 전에 본 세월의 흔적은 그대로였다. 별로 옅어지지 않았다. 시간의 무게를 덜어보려 한 노력은 전부 소용없었다.


아이리시맨 (The Irishman, 2019) 출처 : IMDb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대학생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나의 노력은 무모했다.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일부가 되어버린 시간을 거스르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마틴 스콜세지가 <아이리시맨>을 위해 사용한 디에이징 기술은 성공적이었다. CG로 재현한 배우들의 젊은 모습이 자연스러웠고, 일관된 배우들의 연기는 다선적인 서사를 하나의 무거운 시간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이따금 티가 나는 세월의 흔적도 전하려는 메시지에 꼭 맞았다. 디에이징은 자신의 영화를 위한 하나의 장치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 노력했고, <아이리시맨>을 성해 달성했다. 억지로 세월을 거스른 것이 아니라 작품을 통해 시간을 가꾼 것이고, 또 하나의 멋이 더한 것이다.


아이리시맨 (The Irishman, 2019) 출처 : IMDb


  시간은 무청 엄중해서 쉽게 밀어낼 수 없다. 최신 기술배우들의 근육과 관절을 젊어지게 할 수 없고, 어설픈 노력이 모습을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순간의 미련한 불안함으로 정말 해야 할 일을 미루고 한창 달콤했던 시간여행을 멈춰버린 것이 이제와 아쉬울 따름이다. 되지도 않을 고민을 하느라 허송세월만 쌓았다.

  거울도 안 보는 사람처럼 현실감 없는 생각을 멈춰야 한다. 불필요한 고민을 하고, 순리를 거슬러보려 무모한 노력을 하는 대신에, 마틴 스콜세지가 <아이리시맨>을 만들어낸 것처럼, 세월을 인정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쌓여가는 시간을 가꿔야 한다. 인생에서 명작을 만들어내기 위해. 로버트 드 니로나 마틴 스콜세지처럼 멋이 들기 위해.




아이리시맨 (The Irishman, 2019)

감독 마틴 스콜세지

출연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 조 페시


아이리시맨 (The Irishman, 2019) 출처 : Daum


두 팔 벌려 그를 받아준 조직. 그리하여 그는 명령에 따랐고, 비밀을 지켰다. 그늘에 숨어 미국의 역사를 말들었다. 권력과 충성을 파고드는 마틴 스코세이지의 대서사시. 출처 : 넷플릭스


아이리시맨 (The Irishman, 2019) 출처 : Netflix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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