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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리스리 Dec 18. 2024

공공기관 1년의 운은 담당부처 주무관에게 달려있지

주무관 잘못 만나 병가 쓰고 도망간 사연  

공공기관 직원에겐 사람운이 중요하다.


담당부처 주무관을 누구를 만나느냐가 그 해 1년의 업무난이도를 좌지우지한다.


공공기관 직원은 정부 부처 공무원들에게 있어 위탁사 직원과 다름 없다. 공무원들을 대신해 그들로부터 받은 예산을 가지고 사업을 요리조리 잘 운영해서 1년치 성과에 대한 결과보고를 해야 한다.


공공기관 직원들이 연초에 인사발령 및 업무분장을 확인하고 가장 먼저 하는 것은 담당공무원에게 '인사 드리기'이다. 특히 팀장, 부장 등 연차가 높은 직급일수록 세종시로 가는 KTX를 끊어 담당부처 공무원에게 인사를 올리고 온다. 상급자들의 세종 출장이 특히 많은 달은 2월이다.


일반 직원 입장에서 연락해야 하는(=보고해야 하는) 담당부처 주무관은 보통 1명으로 끝나지 않는다.


여러 개의 지원사업을 동시다발적으로 맡는 작금의 공공기관 격무 상황에서 보통 한 명의 직원이 부처 주무관 3~4명 이상에게 컨택하기도 한다. 이는 다시 말해 나의 직장상사가 4명 이상 더 있다는 뜻과 마찬가지다.


부처 공무원들은 수시로, 비정기적으로 공공기관 직원들에게 업무를 하달한다. 그들이 작성해야 하는 업무보고 계획이나 각종 자료들을 기한을 주며 작성해서 보내라고 한다.


대부분의 것들은 공공기관이 운영하고 있는 지원사업에 대한 실적이나 각종 통계들이지만, 가끔은 '이걸 왜 우리보고?'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부처 공무원들이 직접 작성할 수 있는 자료를 위탁사 위치에 있는 공공기관 직원에게 토스한다.


물론 공공기관 직원에게 연락을 최소화하는 '깨어있는' 젊은 공무원들도 있다. 이들은 왠만한 자료는 본인들이 다 작성하며 정말 불가피할 때만 공공기관 직원에게 연락해 자료 작성을 부탁하는 식이다.

(이런 경우 우리는 '담당 공무원 진짜 잘 만났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부처 주무관을 만나는 경우는 흔치 않으며 어떤 식으로든 위탁사 위치에 있는 공공기관 직원을 달달 볶는 공무원들이 대다수다.




나의 경우 담당 공무원 때문에 병가를 낼만큼 '악의적인' 주무관을 만났었다. 그녀는 매일 아침마다 내게 전화를 걸어 업무 현황 등을 물었는데 '공공기관 직원을 못 믿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집요했다.

 

하루 한 통의 전화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걸어 본인이 의심가는 것들을 나에게 물어 답변을 요구했으며, 내가 여태까지 만난 주무관들 중 가장 집착적이었다.


그러다 사건이 터졌다.


지난 해의 사업보고 및 연말정산보고를 하면서 이나라도움('국고보조금통합관리시스템'으로 정부 예산과 관련해서 모든 사용내역 등 증빙이 여기에 취합된다)에 정산보고를 했는데 그녀는 증빙 내역을 가지고 태클을 걸었다.


예산 사용내역에 해당하는 모든 영수증, 회의록 등 기본 증빙을 다 첨부했는데도 그녀는 "안 맞잖아요! 안 맞다구요! 내가 증빙 빠진 거 많다고 몇 번이나 말해요!!"라며 히스테리를 냈다.


이미 모든 증빙내역이 다 첨부되어 있는데도 그녀가 증빙이 없다고 억지를 부리자 나는 정말 내가 가지고 있는 자료를 모두 탈탈 털다시피해서 모든 서류를 전부 다 이나라도움에 업로드했다. (심지어 지난해 사업은 내가 운영한 것도 아니다. 보통 연초에 인사발령이 나면, 업무를 이어받은 올해 담당자가 지난해의 사업보고 및 정산보고를 해야한다)


한 개의 지원사업을 1년 동안 운영하면서 공공기관 직원이 쓰는 예산 내역이 건은 되는데 그걸 이나라도움에서 일일이 클릭하며 증빙을 다시 첨부한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전화는 물론 이메일로 '모든 증빙이 잘 업로드되어 있다'는 걸 이나라도움 화면 캡처 화면 등과 함께 구구절절 설명했지만 그녀는 폭주를 멈추지 않았다.


더 이상 첨부할 서류가 없을만큼 다 첨부했는데도 그녀는 이메일로 '내가 이렇게나 친절하게 설명했는데 계속 어거지를 피우는군요'라는 뉘앙스로 나에게 답장을 한 뒤 이나라도움의 모든 정산내역을 '반려' 처리했다.


((이나라도움이 얼마나 거지같은(?) 시스템인지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주무부처 공무원, 공공기관 직원, 예산을 지원받는 업체나 개인이 다같이 쓰는 시스템으로서 상위 담당자가 '반려'를 때리면 하위 담당자는 모든 단계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당시 나의 직속 팀장 또한 지독한 회피형 인물로서, 보통 담당 직원과 부처 간에 문제가 생기면 중간에서 팀장이 나서서 해명을 해주는 경우가 대다수인데 팀장은 내가 수시로 이 갈등에 대해 보고를 했음에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내가 친척 장례식장에서 상을 치르고 있는데도 전화를 걸어 업무 독촉을 하는 인간이니 여기서는 건너뛰기로 하자)


아무리 설명을 해도, 아무리 해명을 해도, 모든 증빙을 다 첨부해도 무조건 자기가 맞고 나는 틀렸다고 주장하는 주무관과 그 해 1년을 함께 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주무관 갑질'을 이유로 노조에 찾아가고 갖은 노력을 다 했지만 아무도 나의 입장을 이해하거나 주무관갑질을 저지시켜주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나는 정신과를 찾아갔다. 그리고 병가를 냈다.


문장으로 써 놓으면 굉장히 단순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주무관을 설득하 이해시키려고 했지만 그는 "넌 틀렸고, 내가 맞아"라는 자세를 유지했다.


그는 '갑' 나는 '을'이었다.



덧붙임. 그래서 주무관이 반려처리한 몇 백 건은 어떻게 했냐? 종노비가 별 수 있나요. 처음부터 다시 다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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