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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리스리 Nov 20. 2024

공공기관에선 '대리' 달기도 쉽지 않단다~

02화 공공기관에 '홍보' 경력직으로 입사했습니다만?



공공기관에 경력직으로 입사해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나의 직급이었다.


기자며 홍보직으로 5년 이상 일한 나에게 이 회사가 달아준 직급은 '주임'.


적어도 입사하면 '대리'를 달 거라고 예상한 나에게 회사가 제공한 직급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아, 어쩌면 이 때부터 공공기관 탈출 계획을 세웠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는 나와 같이 입사한 다른 경력직들도 크게 다르지 않아(박사급 경력직한테 '대리'를 달아주거나) 우리 경력직들은 연봉계약서를 체결한 직후에 인사담당자를 우르르 찾아갔다. 경력직 전원이 '내 경력산정이 잘못되었다'라고 느끼기에 충분한 직급이었다. (경력입사자 5명 중에 4명이 '주임', 박사급 직원만 '대리'였다)


그런데 인사담당자의 말이 더 충격이었다. "경력 산정 제대로 되었어요"


그리고 덧붙인 말. "이 회사는 주임 6년차, 7년차 흔해요"


입사 이후 나는 인사담당자의 '경력산정이 제대로 되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이 회사는 주임 6년차, 7년차까지 일하고 '대리'로 승진할 수 있게끔(승진시켜 준다는 것이 아니다. '대리' 승진 자격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승진연한 구조가 짜여져 있어서 타 회사에서 일하고 온 내 5년 경력으로는 '주임'밖에 못 달아준다는 것이다.


진짜 회사에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경력직을 상향지원도 아닌 하향지원을 하다니. 어렵게 입사해서 '주임 6년' '주임 7년' 달 걸 알았다면 애초에 이 회사의 입사지원 자체를 패스했을 것이었다.


그렇게 '주임'으로 입사를 하자 당연히 회사 생활 난이도도 쉽지 않았다. 하필이면 경력직 공채가 신입 공채와 나란히 진행되어서 기존 회사 직원들은 새로 입사한 경력직들도 그냥 '대졸 신입'으로 간주하기 일쑤였다.




일단 직급 자체가 '주임'이다 보니 기존 직원들은
자신들보다 늦게 입사한 나를 그들의 밑으로 셋팅하려고 하였다.




어떤 직원은 복도에서 나를 "어이"라고 부르질 않나, 같은 팀 내에서도 나랑 같은 연차의 '주임' 직원이 나에게 은근한 텃세를 부리는 식이었다. 심지어 내 직속인 홍보팀장은 회의자리에서 "OO주임(나)이 경력직으로 입사해서 △△ 주임이랑 연차는 같지만, 어쨌든 입사는  △△ 주임이 먼저했으니  △△ 주임이 선임인 걸로 하자"라는 식으로 서열을 정리했다.


특히 홍보팀 언론홍보 담당자로서 '주임' 직급을 달고 전직원을 대상으로 일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맡은 업무가 '언론홍보'이다보니 전체 사업부서에서 보내오는 보도자료 및 취재요청 등을 처리해야 했는데 부장급부터 과장급, 대리급, 주임급까지 거의 모든 직급이 자신의 개별사업을 홍보하 위해 연락을 해 왔다.


그리고 '직급'이 모든 것인 이 회사에서 '주임'은 그저 자신들이 해 달라고 하면 그걸 마땅히 들어줘야 하는 가장 하위의 노동계층에 불과했다. 내가 원칙대로 업무를 처리하면 할수록 'OO주임 싸가지 없네'라는 말이 다른 직원을 통해 들려왔고 나는 한동안 싸가지 없는 홍보팀 주임으로 평가받았던 것 같다. (같이 일하는 홍보팀 주임이 술 먹고 나에게 전화를 걸어 "나는 주임님이 좋은 사람인 걸 아는데, 주임님이 욕 먹는 거 들으면 진짜 속상해"라고 말을 해줘서 알았다)


'주임'이 발에 채일 정도로 무덤밭인 이 회사에서 '대리'라도 달았으면 최소한 <승진 문을 통과한 자> <최소한의 예우는 해줄 가치가 있는 자>로 대우를 받았을 텐데, '주임'으로서는 답이 없었다.





그렇다보니 이 회사 직원들의 최고 관심사는 그 무엇도 아닌 승진, '나의 승진'이었다.


공공기관의 승진은 기획재정부에서 정해준 비율을 지켜야 한다. 기획재정부가 가령 "야, 너네 기관은 부장 몇 프로, 과장 몇 프로, 대리 몇 프로, 주임 몇 프로로 유지해"라고 하면 꼼짝없이 그 비율에 맞춰서만 승진을 시킬 수가 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직원들이 '승진'의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싶을 정도로 '승진'이 중요했다.



'주임'이 '대리'되기도 어렵지만, '대리'가 '과장'되기는 더 어렵고, '과장'이 '차, 부장' 달기는 정말 힘든 구조였다.



그러다보니 '승진'은 운빨레이스라고 할만큼 빠르게 먼저 기회를 획득해서 승진한 자만이 또 다시 더 높은 직급으로 앞으로 계속 치고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얻는 셈이었다. 만약에 승진에서 한 번, 두 번 누락이 생기면 언제 다시 나에게 승진의 기회가 올지 모르는, 만년 대리 또는 만년 과장이 될 수 있는 구조였다.


무엇보다 승진에는 '운'도 크게 작용했다. 어떤 해에는 특정 직급 승진 대상자의 비율이 대폭 늘어서 모두가 우르르 승진했다가 그 다음 해부터는 해당 직급 승진 대상자는 씨가 말라버려서 승진이 어려워지거나(그래서 공공기관에서는 무조건 '빨리' 승진하는 게 답이다), 인사팀이 어떤 해에는 육아휴직 중인 직원들도 승진대상자에 포함을 시켜 육아휴직 중에도 승진을 한 직원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해에는 육아휴직자는 승진대상자에서 아예 제외시키기도 했다.


그럼 회사는 승진 못한 직원들을 어떻게 달래는가? 승진 연한에 도달했지만 승진하지 못한 직원들에게 회사는 '호칭 대리' '호칭 과장' '호칭 차장' '호칭 부장'을 달아줬다.


재직증명서상 내 직급은 '주임'인데 회사 내에서의 직급은 '대리'라고 달아주는 식이다. 그래서 회사의 그룹웨어며 공식문서며 명함 등등 내 직급은 '대리'로 나오는데 어디 이직하려고 재직증명서를 떼면 '주임'으로 나오는 해리성 인격장애를 경험할 수가 있다. (내 자아가 두 개에요)


당연히 직원들은 이 호칭 제도를 싫어했다. 내가 대리도 아닌 주임인데 왜 '대리'처럼 일해야 하며, 밖에서 아무리 과장 명함을 내밀고 다닌다 한들 내 월급은 '대리' 월급인데 외부에 보이는 것만 그럴싸하게 포장해주는 회사의 제도가 불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승진 못한 것도 짜증나 죽겠는데 회사가 "야, 그래도 호칭은 올려줬잖아"라고 생색내는 느낌이랄까.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 회사에서 승진에 대한 열망을 놓아버렸다.





덧붙임. 그래서 저는 만년 '대리'입니다. 아! 명함은 물론 '과장'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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