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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담 J Mar 28. 2024

소문내고 싶어요

[우울증 환자 생존기] 12년만의 퇴사

어제 부장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5월까지 런칭하는 지원사업 선정을 마치면 퇴사하기로 했다. 부장님은 내가 그동안 힘들게 회사생활한 걸 알고 계시니까 말리진 않으셨다. 다른부서로의 이동도 생각해보셨다 하셨지만, 지금 상황에서 인사이동은 큰 변화가 아닐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연봉제 직원으로서의 상대적 박탈감, 인사적체, 성취감 없이 하고 싶은 일들의 잦은 퇴짜 등으로 많이 지쳤다는 걸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같은 연봉제 직원으로서 부장님도 충분히 공감하고 계신 부분도 있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기 위해서 끝없이 싸워야 하는 피로감도 기획자로서 이해해주셨다. 두 달의 유예기간이 생겼다. 


퇴사를 결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작가님 한분이 전화주셨다. 5월에 퇴사한다니까 'ㅎㅎㅎㅎ 내년 5월? 이번에도 무르는 거 아냐? 행여 5월이 되어서 마음이 바뀌더라도 부끄러워하지는 마.'라고 했다. 내가 그동안 버릇처럼 회사 그만두고 싶다고 이야기했어서 사람들에게 양치기소년처럼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작가님의 말을 듣고 '혹시 진짜 내가 5월에 또 마음이 바뀌면 어떡하지?'란 생각이 들었다. 


이번 퇴사는 다르다. 일단 상사에게 공식적으로 인원충원을 위한 보고를 했고, 나와 남편이 보다 편안하게 살기위해 어렵게 결정한 퇴사다. 다른 건 몰라도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선택한 퇴사다. 더 건강한 삶을 위한 퇴사다. 여기가 싫어서, 단순히 싫어서 하는 퇴사가 아니라 퇴사의 목적이 있고, 더 크다. 5월 중에 나에게 중병이 발견되지 않는 한 퇴사는 변동없이 진행될 것이다. 중병이 생기면 회사에 적을 두고 치료 받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니까. 하지만 그런 일은 없을거다. 


12년만의 퇴사. 소문을 내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다. 하지만 퇴사까지 너무 많이 남아서 아직은 좀 민망하다. 남편을 볼 때마다 퇴사를 결정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든다. 퇴사하고 일을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바로 일을 잡으면 되지만, 어쨌든 알 수 없는 미래로 같이 뛰어들자고 했으니 미안함이 끝없이 밀려온다. 한편으로는 혼자였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퇴사했을 거라는 생각도 한다. 혼자 있을 때 그런 결정을 하는 것이 더 위험하지만 돈이 없더라도 어떻게든 먹고 살거라고 생각하고 퇴사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마 결혼 안 한 상태였으면 퇴사는 더 빨랐을 거다. 7년 전에 했겠지. 결혼을 하면서 나는 새로운 선택을 한 거였다. 


결혼 직후 퇴사하고 싶다는 의견을 냈다. 그 때, 남편은 아이도 없는데 퇴사하는 건 반대라고 했다. 그 이후로 퇴사의 고민은 계속 되었지만, 이직이 안 되면 움직일 수 없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고, 이직의 기회는 쉽사리 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병이 점점 깊어졌고, 오늘까지 왔다. 


퇴근 후, 남편이 '이제 좀 마음이 편하냐?'고 물었다. 미적지근한 대답을 했다. 100% 편하지만은 않다. 이 불확실성의 시대에 이렇게 안정적인 직장을 아무 대책도 없이 나가버리는 것이 잘 하는 것인지 정말 자신은 없다. 다만 지금이 아니면, 마흔 중반인 지금이 아니면 앞으로를 준비할 마지막 기회를 날려버리는 것이라는 생각에 모험을 해보려는 것이다. 확실한 사업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약한 연결고리의 면면을 보고 퇴사하는 내가 불안하다. 맘 같아서는 나도 100% 확신에 차서 이야기하고 싶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확실한 것은 어느 도전도 하지 않고 여기 있으면 죽을 때 후회할 것 같다는 확신이다. 


일거리나 일자리를 찾는다는 소문을 지금부터 내야할 것 같고, 내가 인생에 이렇게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을 알리고 응원받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조금 참아보기로 한다. 나의 기대는 이번 퇴사로 투약을 줄이거나 중단하는 것이다. 남편에게 '이제 회사를 그만두니 나는 아프면 안 되겠지?' 물으니 '그게 그렇게 한번에 되겠어?'라며 조바심 내지 말라고 했다. 그 말만으로도 조금 위안이 되었다. 약만 끊어도, 내가 환자가 아니라는 생각만 들어도 살 것 같다. 


오늘도 아침약을 챙기지 못하고 나왔다. 아직은 큰 영향은 받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조금씩이라도 투약을 줄일 수 있다면 좋겠다. 일흔의 나이에도 열심히 일하고 계신 어머님과 엄마, 아빠에게 어떻게 퇴직사실을 알려야할지 벌써 걱정이다. 그래도 후회하는 선택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매일 밤 새로운 앞날을 찾아갈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달라고 기도한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나를 내가 응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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