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의 시작

[우울증 환자 생존기] 솜털의 바람처럼

by 마담 J

죽고 싶다는 생각이 온통 삶을 지배할 때가 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생각.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꼭, 반드시 죽고 싶은 순간이 있다.


모든 것을 내가 잘못한 것만 같은 순간.

내가 사람들과의 관계를 망친 것 같고, 내가 모든 일을 망친 것 같은 순간.

그래서 모두 나에게 잘못했다고 손가락질 할 것만 같은 순간.

사실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고, 당신들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말하고 싶은데 할 수 없어질 때.

상대방이 미치도록, 죽이고 싶도록 미운데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느낄 때.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악마같이 느껴질 때.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될 때.

나 말고 다른 무엇도, 누구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덮쳐올 때.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세상에 나 자신밖에 없다고 느끼는 순간.

나를 제외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서는 순간.

나를 해치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할 때.




살고 싶은 것이다.

잘 살고 싶은 것이다.

변화하고 싶은 것이다.

혁신을 원하는 것이다.

죽고싶다는 것.

그건 살고 싶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잘.




죽는 것보다, 아주 잘 사는 것보다,

그냥 사는 건 좀 쉽다.

그냥 지금까지 하던대로 하면 된다.

쉬어지는 숨, 잘 쉬어지면 쉬어지는 대로, 좀 힘들면 힘든대로.

그래도 어쨌든 멈추지 않고 쉬면서 살아온대로 숨 쉬면 살아진다.

그렇게 숨만 쉬는 것만으로도 살아있다는 자각이 들기 시작하면 거기서부터 시작하면 된다.

언제든 죽을 수 있으므로, 일단 숨부터 쉬어보고,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아채기 시작하면 거기서부터 죽어갈 수 있다.

아주 잘 살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지금 이 순간, 내가 물리적으로 살아있는 생명, 유기체라는 현상만으로도 존재의 기본법을 스스로 갖추고 있다는 걸 깨닫기 시작하면, 이제 죽어갈 준비가 된 것이다.

잘 사는 것을 넘어서 심지어 잘 죽을 준비도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일단 숨부터 쉬자.

거기서부터.

모든 것은 코 끝에 부는 그 작은 바람에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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