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환자 생존기] 남길까?
글을 쓰는 것은 살아남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일기를 쓰고
상대방이 없는 편지를 쓰고
허공에 쓰고
신문지에 쓰고
무엇이든 어디든 썼다.
무슨 말을 어떻게 썼는지 모르겠지만 온 마음으로 썼다.
글 써서 밥 먹고 살라는 소리도 간혹 들었지만, 감각의 수장 이후 마음을 다해서 쓰는 법도 잊었다.
나에게 아직 남아있는 재주가 있다면 '버리기'다.
뭘 사는 것도 좋아하지만, 버리는 걸 더 좋아한다.
계절마다 해마다 내 물건은 물론이고 엄마 살림도 많이 정리했었다.
내 살림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버리는 일에 더욱 열중했다.
성인이 된 후의 사진은 95%를 버렸다.
어릴 적 편지와 쪽지는 아마 중 고등학교 때 정리했을 거고, 성인 이후의 편지도 거의 다 버렸다.
옷, 신발, 그릇, 화분 등등 생활잡화를 정리하는 건 너무 쉬운 일이다.
쓸만한 건 기부하고, 그렇지 않은 건 버린다.
무엇을 버렸는지 기억하는 건 힘든 일이다.
버리고 나서는 대부분의 경우 그런 것들이 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버린 후 뭔가를 들이지 않는 후속 관리가 중요하다.
이걸 깨닫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 번 알고 나면 뭔가를 들일 때 열번 생각하던 걸 스무번 생각하게 된다.
버린다는 건 삶을 정리하는 것이다.
내가 죽고 난 이후 남겨진 사람들이 내 물건을 최소한으로 정리하기를 바란다.
세상에 사연 없이 내게 들어온 물건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그 사연들은 내게만 의미 있다.
내 물건이라는 이유만으로 남겨진 사람들에게 또 다시 사연을 만들어가며 짐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무엇을 버릴까? 가 아니라 무엇을 남길까? 를 생각해야 쉽다.
이 코트를 버려도 될까? 가 아니라 저 코트를 남길까? 를 질문하면 버릴 것에 대한 고민을 덜 수 있다.
저 삶을 버릴까? 가 아니라 이 삶을 남길까?
이 직장을 버릴까? 가 아니라 저 직업을 남길까?
그 친구를 버릴까? 가 아니라 이 친구를 남길까?
지금까지 나는 질문을 참 잘못하고 있었구나 싶은 순간들이 몰려온다.
중년은 이렇게 오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