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환자 생존기] 숨을 쉬게 되었다
스위치가 내려갔다. 한 순간이다. 방금 전까지 웃고 떠들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고이고 울컥울컥 울음이 몰려온다. 20여일 아주 괜찮게 지냈다. 자살도 자해도 생각하지 않고, 컨디션도 크게 떨어지지 않고, 몸이 좀 힘들어도 마음은 괜찮았는데. 갑자기 정전이 되듯이 나의 모든 세계가 꺼져버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나의 모든 근육들이 굳어버렸으며, 얼굴은 일그러졌다. 당황스럽다.
오후 2시쯤 스위치가 내려가고, 겨우 시간을 보내고 퇴근했다. 그 네시간 동안 죽고 싶은 마음과 당장이라고 칼로 그어버리리고 싶은 목과 손목과 발목을 사수하느라 진땀을 뺐다. 퇴근해서는 신랑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 평소처럼 밥을 하고, 세수를 하고, 운동 선생님과 약속한 운동을 했다. 신랑은 나의 컨디션에 아주 예민하기 때문에 아마 '안 좋아?'라고 물었을 것이다. 나는 '아니'라고 답했을 것이고. 아침약도 먹었고, 저녁약과 수면제, 유산균, 마그네슘도 챙겨먹었다. 새로 바꾼 수면제 덕에 요즘엔 그래도 잠을 자는 편이라 불안한 마음을 누르고 신랑 옆에서 조용히 잠에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움직일 수가 없었다. 출근을 포기했다. 오후에 나가려고 했지만, 그도 포기했다. 보통은 출근을 못 하는 경우 하루 종일 자는데, 유투브와 멜론을 배경음으로 틀어놓고 의미없이 눈만 뜨고 있었다. 그러다가 얕은 잠을 자고 깨고를 반복했다.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심리학자와 뇌과학자의 강의를 들으며 죽지 않고, 마음의 평정을 찾는다는 강의를 들었다.
죽음은 늘 함께 있다. 내가 잠시 죽음을 잊었다고 해서 그것이 멀리가거나 사라진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렇게 불쑥 맥락없이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몰려올리 없다. 갑자기 소나기 구름이 몰려오듯이 울컥하는 울음과 함께, 5분 전까지 동료들과 웃고 떠들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불쑥 나타날 수가 없다. 이렇게 기척없이 나타날 수가 없다. 어디에 있다가 이렇게 나오는 거니..
근 20여일 너무 평안하고, 죽음과 자해 생각없이 지냈다 했다. 모든 것이 좋고 감사하고 행복하다 했다. 그 틈새로, 갑자기 깨지는 발밑의 크레바스처럼 죽음이 나타난다. 죽어버릴까. 그럼 다 끝나지 않을까. 사는게 무슨 의미가 있나. 어서 할머니가 되었으면 좋겠다. 언제 자살해도 이상하지 않게.
그랬구나. 잊고 365일 중에 고작 20일 괜찮다고 잊어버렸는데, 나는 늘 죽고 싶은 충동과 싸우고 있었구나. 전장터의 칼질을 보듯 내 발목과 손목, 목을 그어대는 촉감과 환상을 억누르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앉아서 서류작업과 통화를 하고 메일을 보내고 있었구나. 죽고 싶지만 죽지 않기 위해서 매 순간 최선을 다 하며 살고 있었구나. 그랬구나. 이게 진짜 내 모습이지. 나에게 익숙한 모습이지. 그렇구나. 나도 성장하는 사람이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죽음이라는 모래주머니를 달고 날아오르기에는 내가 너무 버거운 거구나. 이런 내가 싫은 거구나. 사실 까보면 별거 아닌 내가 들통나는게 싫은 거지. 그래서 적당한 때 죽고 싶은 거구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익숙한 느낌.
아주 진하게 죽고 싶다는 느낌.
결국 손목을 그었다. 피를 본 건 처음이다. 잘 그을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칼날을 어떻게 써야 잘 그을 수 있는지. 뭔가 탁~! 풀리는 느낌. 숨이 쉬어졌다. 시간이 흐르고 한번 더 그었다. 이번엔 아팠다. 그러고 보니 처음에 피를 봤을 때는 아프다는 느낌도 못 느꼈다. 아픔을 늒기고 나니 더 현실로 돌아온 것 같다. 이래서 자해들을 하는 건가?
보통은 청소년들이 자해를 많이 한다고 한다. 자해를 검사하면 청소년 자해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자해는 진짜 죽으려고 하는 경우도 있고, 나처럼 뭔가 해소하기 위해서 하는 경우도 있다. 청소년은 후자가 많다는 것 같다. 완경을 시작하려는 시기에 청소년 유형의 자해를 시작하는 이 아이러니.
어쨌든 손목을 긋고 나서 진정이 되었고, 신랑은 그저 내 손목을 만져보았다.
미안하다.
상담이 늘어날 것 같다.
처음 상담을 시작하고, 약물치료를 시작할 때 나는 거뭇거뭇 형상을 보았고, 온몸을 돌아다니며 그어대는 칼의 촉감을 느꼈다. 이명도 있었고. 약물 치료를 시작한 후 거뭇거뭇한 형상은 어느 순간 없어졌고, 칼날의 촉감은 무뎌졌고, 이명도 가라앉았다.
중간에 약물치료를 3개월 정도 쉬었다. 괜찮아졌다고 생각했고, 의사 선생님도 동의했다. 아니 남편 말로는 내가 의사 선생님 말을 마음대로 해석했다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신랑이 보기에 나는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3개월의 끝에서 나는 하나도 괜찮지 않은 나를 인정하면서 다시 상담과 약물치료를 시작했다.
약물치료는 적응하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 효과를 보기 시작하는데 2-3주 정도 걸리는 경우도 있다. 이번에 내가 그랬다. 어쨌든 그렇게 상담과 치료를 재개한지 이제 한 3달 쯤?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이벤트가 생겼다. 뭘까? 어디서 틀어진걸까?
어쨌든 손목을 긋고 난 후 시간이 조금 지나고 하루, 이틀 지나면서 나는 평정심(?)을 찾았다. 보통의 하루가 갔다. 이런 나를 나조차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모르겠다. 롤러코스터가 티익스프레스가 되어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