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다시 식집사로

[우울증 환자 생존기] 식물이 다시 나를 살려줄지도

by 마담 J

지난 달의 급속한 울증 상태를 벗어나면서, 그래도 좋은 징조가 2가지 나타났다. 훌라에 점점 진심이 되기 시작했고, 다시 식물을 들이기 시작했다. 뭐라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시작한 건 꽤 오랜만이다.


특히 훌라 수업에 꽤 집중하고, 잘 배우려고 하는 나 자신이 점점 기특해지고 있다. 그냥 좋아보여서, 훌라댄서들의 인스타그램은 모두 생기발랄하고, 진심으로 행복해보여서 시작했지만, 집중도 안 되고, 홀릭이 되어 여러 댄서들의 수업을 듣고, 훌라 스커트인 파우를 열심히 사는 이들에게 동화되지 못했다. 연습을 따로 하지도 않았고, 그냥 수업시간 1시간 반만 즐겼다. 단순히 춤을 배우는게 아니라 하와이 문화와 영성, 짧은 명상 등이 섞인 수업이어서, 그리고 고맙게도 우리 동네에서도 수업을 열어주셔서 수월하게 10개월을 다녔다. 요가, 필라테스, 헬스 등 많은 운동을 했지만, 대부분 신청하고 안 가는 편이었는데 훌라는 꾸준하게 다녔다. 4개월을 쉬고 다시 시작한지 3개월 째다. 약간의 휴지기 덕분인지 수업 하루하루가 더 짙게 다가왔고, 재미있어졌고, 진지하게 춤 동작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결국 시작 1년이 지난 시점에서 처음으로 훌라 원피스 무무를 샀다. 내 돈으로 산 두번째 훌라 옷이다. 손목밴드와 헤어리스도 샀다. 우연히 일주일에 2번 수업을 연달아 시작하게 되었고, 그게 오히려 더 좋은 자극이 된 것 같다. 안무가 익숙해지고, 더 세심하게 할 수 있어서 좋았다. 다음주부터는 오하나(함께 춤추는 사람들)과 따로 연습하는 날도 잡았다. 프로젝트가 마무리되던 5월에 다시 시작하면서 여유가 생겼고, 새로 하는 일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해서 어려운 와중에 그래도 집중할 수 있는 것이 생겨서, 경제적 여유는 팍팍해졌지만, 시간과 마음은 틈이 생겨서 잘 맞아떨어지는 듯 하다.


그리고, 다시 식물을 들이기 시작했다. 사랑이가 처음 왔을 때만 해도 화분이 50여개는 있었다. 선인장도 말려죽이는 나였지만, 시어머님이 키우다 두고 가신 화분들을 돌보다가 식물에 빠졌고, 화분과 새로운 식물들을 입양하느라 정신없이 3년 반을 보내면서 많이 죽이기도 했지만, 많이 살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사랑이가 왔다. 이갈이 시기이면서 호기심 그득한 어린 개체에게 병충해 방지와 영양분 공급을 위해서 약품이 들어간 화분은 늘 모서리에 얹혀진 크리스탈 잔 같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아이들을 친구들에게 입양보내고, 엘베 나눔과 굿윌스토어 기부 등을 통해 떠나보냈다. 마침 코로나로 식집사가 유행하던 시절이라 모두들 흔쾌히 아이들을 데려갔다.


초록이 가득하던 집에 이제 연한 베이지 색의 꼬물이와 그 아이의 형형색색 장난감들만 남았다. 아주 간단히 키울 수 있는 아이들, 무심해도 잘 자라는 아이들만 3-4종이 남았다. 그렇게 5년이 지났고, 이번 봄에 '다시 식물을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이소에서 파는 씨앗들을 골고루 샀다. 상추, 바질, 대파 등등. 실제로 파종은 한 두달 후에 이루어졌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파종을 위한 작은 컵들에 심어서 모종을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저 화분에 뿌렸다. 적게는 400립, 많게는 1,000립의 씨앗들이 있었는데 싹은 많이 났지만, 모종으로 자라는 건 힘들어보였다. 강한 아이들만 살아남는 와중에 아직도 물을 주며 지켜보고는 있다. 그렇게 한 두달이 지났고, 이젠 진짜 다시 식집사가 되고 싶어졌다. 그 동안 화분에서 겨우 겨우 연명하던 아이들을 정리하여 일부는 화분에, 일부는 우리 집의 모든 유리컵에 나눠담은지 몇 개월만이다.


수경재배한 스킨답서스와 히메몬스테라에서 싹이 트고, 이름은 뭔지 모르겠는 아이들한테서도 싹이 나서 자라는 걸 보고 자신감이 생겼다. 식물은 당연히 흙에서 더 왕성하게 자라지만, 왠만한 식물들은 수경으로도 잘 자란다. 흙을 고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어서 부담감을 줄이기 위해 수경으로 키울 수 있는 아이들을 들이기로 했다. 우선 엄마집에서 홍콩야자, 몬스테라, 알로카시아, 스노우 사파이어를 잘라왔다. 유리화병과 다른 몇 가지 식물들도 당근으로 들였다. 식물들을 놓고, 행잉식물도 걸 수 있게 작은 인디언 행어도 당근으로 얻었다. 모두 내 인생 첫 당근 거래다.


당근에는 참 많은 식물들이 있었다. 데려오고 싶은 아이는 많지만, 첫 식집사 시절처럼 키우고 싶은 모든 아이를 내 집에 데려올 수는 없다. 경제적인 문제도 있고, 공간 문제도 있다. 무작정 화분으로 공간을 채울 수는 없으며, 햇빛이 들지 않는 공간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1주일 열정적으로 쏟아붓던 식물 검색의 속도를 좀 늦추기로 했다.


그래도 집안 곳곳에 눈길 닫는 곳마다 초록이들이 보이니 기분이 좀 좋아졌다. 사랑이 숨소리, 발걸음 하나에도 신경이 예민해지는 것처럼 식물들의 하루하루 상태를 살피는 게 좋았다. 내가 갑자기 찾아오는 우울감에 쓰러져있을 때도 아이들은 소리없이 자라고 있으니까. 최선을 다해서 새로운 뿌리와 새로운 잎을 틔우는 걸 보면 어쩐지 응원하게 되고, 염원하게 되니까.


새로운 일은 아직 답보 상태라 성취감이 없어서인지 에너지 레벨이, 감정 레벨이 오르락 내리락이라 남편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그동안 잘 해내던 집안 일도 힘에 부치고, 아침까지 좋았던 기분이 점심 때는 바닥으로 곤두박질 쳐서 남편이 오랜만에 밥도 해 줬는데 기운이 막 솟지는 않는다. 식집사 열정에 또 갑자기 1주일만에 극 이성적으로 브레이크를 걸었지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다른 식집사들의 책을 읽기로 했다. 뭔가 탈출구가 생기겠지. 그렇겠지..


지난 주에 상담을 받고, 일기쓰고, 30분 쓰기하고, 명상하고, 묵주기도하는 아침루틴을 지켰는데 어제 흐트러졌다. 뭔가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이 났을 때, 일단 뭐든 하는 걸 연습중이다. 아직 다 잘 되지는 않지만, 한 걸음씩 또 옮겨보기로 한다. 언젠가는 다시 50개, 100개의 화병과 화분이 생길지도 모른다며,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가보자고 생각한다. 50여개의 화분을 기르던 때는 병이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지만, 식물에 집중하는 시간들이 나름 나락의 경사도를 완만하게 해주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니까 다시 격한 2형 양극성장애의 양상을 보이는 지금의 내 상황에도 도움을 얻을 수 있을것이다. 식물들과 함께 나의 속도로 살아가보겠다. 느려도 그게 내 속도라고 생각하면서.

keyword
이전 09화죽음의 가루를 뚫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