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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Feb 18. 2019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엄지혜 <태도의 말들>

단숨에 읽어버리기 미안한 책이 있다. '채널예스' 프랑소아 엄, 엄지혜 기자의 <태도의 말들>을 읽었다. 그녀가 그동안 인터뷰한 사람들의 말을 옮겨와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정리했다. 조금씩만 아껴 읽어야지 다짐했다가 앉은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 작가가 오랫동안 쌓아온 것들을 단숨에 읽어버린 것 같아 미안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다음 페이지가, 다음 말들이 너무 궁금해서 나도 모르게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그냥 여러 번 다시 꺼내 읽지 뭐. 그런 마음으로 도곤도곤 가슴 뛰며 읽었다.


나는 사람의 입말을 좋아한다. 인간극장과 휴먼다큐 작가로 일하며 사람들의 생생한 일상과 몸짓, 표정, 특히 말에 마음이 갔다. 누군가의 삶과 경험이 농축된 보석 같은 말을 발견할 때면, 나 혼자만 가지고 있기 아까워 그것들을 어떻게 옮겨 전해야 하나 고민할 때가 많았다. 아마도 그런 직업적 경험이 있어서 더욱 공감하며 읽었던 것 같다.


언제나 사소한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상의 감각이 합해져 한 사람의 태도를 만들고 언어를 탄생시키니까. 누군가를 추억할 때 떠오르는 건 실력이 아니고 태도의 말들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새삼 체험하고 있다. "말 안해도 말지?", "내 진심 알잖아"라는 말은 더 이상 듣고 싶지도 않고 하고 싶지도 않다. 우리는 서로의 진심을 모른다. 태도로 읽을 뿐이다. 존중받고 싶어서 나는 태도를 바꾸고, 존중하고 싶어서 그들의 태도를 읽는다. 문제는 존중이니까. 11p 머리말


책을 읽으며 인터뷰어의 태도에 관해 생각했다. 인터뷰는 말과 말이 오가며 생각과 마음을 알아보는 일. 방송작가를 거쳐 글 쓰는 작가에 이르기까지 나도 많은 인터뷰를 경험했다. 오랫동안 인터뷰어였다가 인터뷰이가 되었을 때의 당혹감을 잊지 못한다. 기억나는 무례한 인터뷰어가 몇 있다. 오랫동안 일반인들의 삶을 심층 인터뷰했던 나는, 그들의 태도에 크게 실망하고 상처 받았던 것 같다. 나 말고도 얼마나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왜곡하고 상처 주었을까 하고. 그러는 한편, 나는 괜찮은 인터뷰어였나 돌아보는 시간이 많았다.


그만큼 나에게 말은 조심스럽고 어렵다. 인터뷰나 강연을 앞두고 늘 기도한다. 제발 너무 많은 말을 하지 않도록 해 주세요. 생각 없는 말로 누군가에게 상처 주지 않도록 해 주세요. 쓸데없는 말로 나의 얕은 바닥을 드러내지 않게 해 주세요. 말이라는 건 정말 무겁고 두렵다는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나는 말해야만 한다. 당신에 대한 관심과 애정, 공감과 진심, 나의 마음을 표현하려면 나는 말을 건네야만 한다.


<태도의 말들> 좋은 말들이 너무나 많네요.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 사회학자 엄기호

행간을 읽는 사람이 있다. 단어보다 쉼표를 눈여겨 읽는 사람이 있다. 말보다 표정을 먼저 읽으려는 사람이 있다. 말하지 못하는 걸 듣는 사람, 그들을 만날 때 나는 마음이 쾌청하다. 사회학자 엄기호는 "말하는 걸 듣는 건 수비만 하는 것"이라며 "고통은 침묵으로 표현될 때가 많기 때문에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19p


지금의 나에게 가장 인상 깊은 말을 골라보았다. 요즘 나는 너무 많은 말을 하지 않고 침묵과 행간을 읽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 안에 더 진실한 마음이 숨어있다는 걸 깨닫는다. 단정 짓지 않고, 조바심 내지 않고, 그냥 지나치지 않고, 말하지 못하는 마음을 헤아리고 싶다. 말하지 못하는 걸 듣는 사람이 되고 싶다.


책 속에는 작가가 인터뷰하며 종종 묻는다는 질문들이 등장한다. 사소한 것 같지만 깊은 질문들. 나라면 어떻게 대답할지, 어느샌가 나의 말들을 헤아려보았다. 같은 질문이라도 우리는 다 다른 답을 가지고 산다. 나의 대답은 무엇인지 한 번쯤 생각해보면 좋겠다. 이 정도면 <태도의 말들>은 나에게 미안한 책이 아니라 고마운 책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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