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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선희 May 01. 2024

푸진 나의 하루

아침에 일어나 약 하나를 꼭 챙겨 먹어야 하는 삶을 살아버리게 되었다. 건강 검진에서 콜레스테롤 수치가 너무 높아 의사와의 상담을 권유 받았는데, 무슨 말을 듣게 될지 너무나 잘 알 것 같아서, 상담을 미루고 미루다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동네 내과를 찾게 되었다. 결국은 고지혈증 약을 처방 받았고, 운동과 식단을 병행해야 한다는, 내 예상에 딱 들어맞는 이야기를 들었다. 약을 처방받으면서도 나는 “어디 가서 챙겨 먹는 약 있냐는 질문에 고지혈증약 먹는다고 얘기 해야 하는 거네요, 이제?”라고 서글픈 질문도 했다. 아, 후지다.


그런데, 의외로 좋은 점이 하나 있었다. 고지혈증약을 챙겨 먹으면서, 영양제도 함께 잘 먹게 되었다. 비타민, 유산균, 루테인 정도를 사두었는데, 챙겨 먹는 것을 맨날 까먹었었다. 근데 이제는 건강하게 살기 위해 꼭 먹어야 하는 약을 챙겨 먹으면서 더 건강하게 살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약을 함께 먹게 된 것이다, 꼬박꼬박. 후지지 않았다. 푸진 하루의 시작일 뿐! ‘푸지다’는 어감이 ’후지다‘와 비슷해서 그 뜻도 부정적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푸지다’의 뜻은 ‘매우 많아서 넉넉하다’이다. 넉넉한 약과 더불어 넉넉히 셀프 챙김을 하는 아침을 맞이한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푸진 상태가 되었다.


나에게는 푸진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머리숱인데, 문제는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 또한 푸지다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기지개를 펴고 머리를 다시 묶는데 후두둑 떨어지는 머리카락이 일어서 있는 내 종아리에 와서 부딪히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그래서 머리를 다 묶고 뒤돌아보면 바닥에 또 한가득 머리카락이 있다. 이 정도이니, 청소기를 배치한 곳이 드라이를 하는 화장대 바로 옆인 것도 설명이 되겠다. 청소에 대한 부담 또한 푸지다는 단점이 있지만, 물질적인 부분이 푸지지 않는 이 상황에서 나에게 푸진 게 뭐라도 있다는 것이 묘한 위로가 된다.


그렇게 위로받고 싶어서 나에게 푸진 게 또 뭐가 있는지 계속 찾아 보게 되는 것이다. 나는 핸드폰에 사진이 푸지다. 방문자 리뷰도 꼭 쓰는 편이고, 실행에 잘 옮기지는 않지만 사진과 영상을 엮어 나만의 작품을 만들어 보고 싶기도 해서, 사소한 것이라도 뭔가 의미 있다 생각되는 상황에서 셔터를 누르게 된다. 사진이 푸진 것은 기억할 것도 많다는 이야기 같아서 참 좋다. 또 일상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된 것 같아 또 좋다. 매번 사진을 정리하는 것이 싫어, 이번 핸드폰의 용량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아, 맞다. 나는 푸지게 먹는 것도 좋아한다. 한 입 가득 물고 냠냠 먹을 때, 말하는 입은 없고, 먹는 입만 있어서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음~’ 정도의 감탄사밖에 없는, 씹는 동안의 그 순간을 좋아한다. 이렇게 꼭꼭 씹는 얘길 하다 보니, 푸진 게 또 하나 생각났다. 나는 사랑니도 푸지다. 위아래 왼쪽 오른쪽 하나씩 총 네 개가 가지런히 나서 뺄 필요도 없이 사랑니가 네 개나 있는 것이다. 굳건히 씹는 제 역할을 아주 잘하고 있다. 그런데 조심할 것이 있다. 푸짐하게 차려진 밥상에서 감사의 말로 “우아 정말 푸지네요”라고 말하면 상대방이 “후지다”라는 말로 알아들을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푸짐하다’라는 말로 바꿔 쓸 것을 권한다.


한없이 후질 수 있는 상황에서도 푸져질 수 있다. 한끗차이다. ㄱㄴㄷ 순서로 따져도 ㅎ과 ㅍ은 딱 하나 차이다. ㅎ에서 ㅍ으로 딱 한 계단만 올라오면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두 모두 푸진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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