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선희 Apr 24. 2024

팔랑해

드라마 <눈물의 여왕> 속 해인은 종양 수술을 받고 나면, 그동안의 기억을 잃을 것이 두려워 수술 받기를 주저한다. 그런 해인을 꼭 살려야 하는 현우는 해인에게 수술 받으라고 눈물로 호소한다. ‘저 둘은 진짜 사랑하는구나’ 생각하며 드라마에 막 감정이 이입되는 주말 저녁을 보내고 있다. ‘기억을 잃는 게 대수야, 요즘은 스마트폰만 들여다 봐도 나에 대한 모든 기억이 자연스레 복구될 텐데, 우선 살고 봐야지’라는 T적 마인드가 감히 끼어들 틈도 없이 눈물이 광광 난다. 감정이입하면서 보고 있는데, 같이 살고 있는 매우 현실적인 남성은 ‘과자 먹을래?’라고 말하며 내 감정선을 방해하고야 말았다. ‘그래, 이게 현실이지.’     


저렇게 엄청난 사랑을 드라마로 보니, 좀 낯설기도 했다. ‘현실에 있을 법한 사랑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이 너무 잘생기고, 예뻐서 그런가, 내 얘기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사랑해’보다 더 큰 말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된 건, 드라마를 뛰어 넘는 사랑이 우리 주위에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사랑해’보다 큰 말이라… 사랑해, 사랑해, 오랑해, 육랑해, 칠랑해, 팔랑해…. 결국 말장난을 해 버린 것이었는데, 그러던 중 내 귀를 사로잡았던 말은 ‘팔랑해’였다. ‘팔랑이다’는 ‘바람에 가볍고 힘차게 나부끼다. 또는 그렇게 되게 하다.’라는 뜻이다. 사랑의 순간, 우리는 절대 고갈되지 않는 에너지를 연료 삼아 팔랑거리며 걷게 된다, 팔랑거리며 살게 된다.    

   

주말에 남편과 산책길에 나섰다. 얕은 하천길을 따라 걷는데, 엄청 큰 두루미 같은 게 날아왔고, 그 송곳 같이 뾰족한 부리에 기겁했던 적이 있었다. 너무 놀라 소리도 못 지르고, 우스꽝스러운 스텝을 밟으며 도망가는 나의 모습이 꼭 팔랑대는 것 같았을까? 밥을 먹다가 옆 테이블 커플의 대화를 엿듣고 너무 풋풋하다며 그 말을 조잘조잘 전달하는 내 모습이 또 팔랑대는 것 같았겠지. 그에게는.     


사랑 그 너머의 대단한 사랑은 사실 별거 아니었네. 함께 있는 동안 팔랑거릴 수 있는 것. 그래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살짝 웃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대단한 사랑의 모습일 수 있으리라.      


그러나 우리는 팔랑거릴지언정 ‘팔랑귀’가 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팔랑거리다’와 ‘팔랑귀’는 표기가 매우 유사하고, 의미의 원천도 같지만, 사랑하는 상황에선 그 두 가지가 완전 상반된 결과를 보여 준다. 사랑하고 있는 난 지금 충분히 행복한데, 가끔 주변의 소리를 듣다 보면, 내가 너무 희생하나, 나만 너무 좋아하나, 우린 지금 잘 지내고 있는 게 아니었던 건가, 하는 못난 생각이 들게 된다. 귀가 팔랑거리며 일으킨 바람은, 현재 굳게 믿었던 행복을 언제든지 무너뜨릴 준비가 되어 있다. 사랑의 힘으로 팔랑이는 둘 주변에는 팔랑이지 않는 굳건한 보호막이 있어야 한다. 서로의 믿음이 되어 주어야 한다. 혼란스러워하는 상대에게 ‘아니야, 네가 생각하던 게 맞아’라고 말해 줄 수 있는 믿음 말이다.      


바쁜 언니 대신 조카의 하굣길을 함께했던 일이 있었다. 한 30분은 여유를 두고 나와 교문 앞을 지키고 있는데, 애들이 다 빠져나가고 나서야, 동글동글한 조카가 모습을 드러냈다. 반가운 마음에 펄쩍펄쩍 뛰며 조카 이름을 불렀는데, 오늘은 이모가 학교에 마중 나갈 거라는 것을 언니가 미리 말해주어서인지 내 모습을 보고도 별로 감흥이 없어 보였다. 같이 나오던 조카의 친구는 ‘야, 너네 이모 텐션이 왜 이렇게 좋니?’라고 해서 내가 좀 오바했나 싶었지만, 원래 사랑하는 사람 앞에선 팔랑대는 거니까, 아랑곳하지 않고 조카의 가방을 내 어깨로 옮겨 멘 뒤, 손을 꼭 잡고 앞뒤로 흔들면서 집에 왔다.      


요즘 내가 보는 영상들에는, 귀여운 강아지들이 기분 좋게 웃거나 뚱땅거리며 신나게 걸어가는 모습들이 가득하다. 주인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보여주는 아가들의 팔랑거림이 무해한 감동의 물결이 되어 내 가슴에 탁 하고 와서 부딪힌다.      


나의 팔랑거림도,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의 마음에 감동으로 전달되기를. 그 누가 뭐라고 해도, 내 감정에 솔직할 수 있기를. 그래서 결국엔 세상에서 제일 사랑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