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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선희 Mar 20. 2024

다그다, 다, 그다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다가간다. 어느 한쪽만의 짝사랑이 아니라면, 조금이라도 맘이 통하는 사이였다면, 그 순간 둘 사이에 묘한 떨림이 감지되고, 입을 맞춘다든가, 속삭이며 고백하겠지. 가까이 다가간다면, 그의 향기를 느낄 수 있고, 눈동자 속의 내 모습도 볼 수 있고, 살짝 만져볼 수도 있다. 다가간다는 것은 참 떨리는 일이다. ‘다가가다’의 앞부분인 ‘다가’는 ‘다그다’의 활용형이다. ‘다그다’는 ‘어떤 대상이 있는 쪽으로 몸을 움직여 그 대상과의 거리를 가깝게 하다.’라는 뜻이다. 다소 투박했던 말 ‘가다’는, ‘다그다’와 만나 무척이나 떨리는 말이 되었다.      


달은 차차차 당신의 얼굴이 되더니 넓은 이마 둥근 코 아름다운 수염이 역력히 보입니다.     

간 해에는 당신의 얼굴이 달로 보이더니 오늘 밤에는 달이 당신의 얼굴이 됩니다.      

-한용운, <달을 보며>     


여기, 당신을 그리워하다, 달을 보면서도 당신의 얼굴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다. 당신은 달처럼 동그랗고 환한 얼굴을 지녔을까, 글쎄, 아니었어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그 사람은 무엇을 보든 당신을 떠올렸을 테니까.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때엔, 주변의 모든 것들이 다, ‘그’다. 다 그로 보이고, 다 그를 떠올리게 할 것이다.      


연애하던 시절, 차 안에서 자주 들었던 노래가 있었다. 그 노래에는 멜로디 중간 중간 ‘딴딴’ 하는 박자가 나오는데, 그때마다 그는 그 박자에 맞춰 눈을 깜빡거렸었다. 이런 개그 너무 좋아하는 나로선, 그대로 빵 터져서는, 다음 그 박자가 나올 때 이제는 뭘 보여주려나 하고 기대하곤 했다. 이제 와 들은 이야기지만, 내가 자꾸 새로운 것을 기대해서 그는 참 힘들었다고 했다. 눈깜빡거리는 노래로 우리의 추억을 책임졌던 그 노래는 이제는 거의 듣지도 않고, 잊었던 노래였다. 그런데 얼마 전 라디오에서 그 노래가 나왔다. 그리고 그 딴딴 하는 박자를 듣자마자 갑자기 나는 그 시절로 순간이동을 했고, 그곳엔 두 눈동자를 깜빡거리는 젊은 그와 빵 터져 웃고 있는 젊은 내가 있었다.      


공유한 경험이 많을수록 그를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아진다. 그래서 만약 헤어지게 되면 더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헤어져서도 여기 저기 이것 저것 그를 떠오르게 할 것들 천지인데,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또 다시 생각해 보니, 공유한 경험의 수만큼이나 공유한 경험의 깊이가 그를 떠오르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오래 만나지 않아도, 함께한 경험이 강렬하고,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눴다면, 그렇게 다가갔다면, 난 또 그를 오래 기억할 테니 말이다. 그래, 그렇다면, 헤어지더라도 그 기억은 자연스럽게 내 곁에 두자. 그 기억이 나를 추억 속에 데려다 놓으면 그곳에 갔다 오자. 그 기억 속엔 그만 있는 게 아니라, 나도 있으니. 나를 지울 순 없는 노릇이니까 말이다.   

   

지난주엔 시댁 행사에 가서 남편의 어릴적 모습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듣고 왔다. 어렸을 때 그는 아주 세침했다고 한다. 그리고 놀러갈 땐 꼭 문제집을 챙겨서 갔다나? 물론 그것은 시어머니의 압력이 조금 있었겠지만, 이렇게나 매사에 치밀했다니, 지금의 그의 모습과 많이 달라, 어느 것이 진짜 모습일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모습도 ‘그’다. 다 ‘그’다. 이렇게 또 한 발자국 다가간 것 같아 좋다.      


다가가 확인한 그의 모습에서 어느 것 하나 빼놓지 않고, 다 그의 모습으로 인정하는 것. 그렇게 커진 마음을 안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를 떠올리는 것. 그렇게 쌓인 경험을 잊지 않고 품는 것. ‘다그다’에서 발견한 사랑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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