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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선희 Feb 08. 2024

수나롭구나

토요일 아침엔, 남편이 동네 형님들과 농구를 하러 나가기 때문에, 조용히 혼자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다. 침대 맡에 놓인 안경을 집어 쓰고, 티비를 켜고, 잠시 멍하니 있었다. 어떤 날은 뒤숭숭했던 꿈자리의 영향으로, 머리가 지끈거리는 경우가 있는데, 오늘은 아닌 것 같아 다행이었다. 이부자리를 대충 정리하고 밖으로 나와 커튼을 걷었는데, 세상이 온통 하얬다. 내리는 눈송이 주변이 뿌옇게 보일 정도로, 습기를 가득 머금은 눈송이들이 창에 와 부딪히고, 땅에 차곡차곡 쌓였다.


바깥은 이미 아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놀이터마다 눈사람이 한 8개씩은 있는 것 같았다. 눈이 잘 뭉쳐지는 덕에 눈사람 머리 위로는 기다란 산다라박 머리가 만들어져 있었고, 세밀한 표정까지 탑재한 눈사람도 있었다. 이날은 엄마 아빠들의 어깨가 빠지는 날이었을 거라 조심히 추측해 본다.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1집 1썰매인 나라가 되었던가. 집집마다 썰매를 끌고 나와서는, 엄마 아빠는 아이들을 태워주고, 해맑은 아이들은 썰매에 탄 상태로 주변의 눈들을 다 끌어와 썰매 안에 넣었다. 이날은 옷이 젖어도, 눈 위에 넘어져도 좋을 날이었다. 그렇게 부모님들은 기꺼이 인력거꾼이 되어 운수 좋은 날을 보냈을 것이다.


저녁에는 중1 아이들의 수업이 있었는데, 수업을 오는 중에 자기들끼리 눈싸움을 한바탕 했는지 머리가 잔뜩 젖어 들어왔다. 그러면서 “선생님 너무 더워요”라고 했다. 이미 손은 빨개져서 핫팩을 쥐고 있으면서. 그 핫팩 때문에 더운 건지, 눈싸움으로 흥분한 상태여서 더운 건지. 그 덕에 이날 수업은 좀 더 많이 웃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니, 이 수업은 23년의 마지막 일정, 마지막 돈벌이였다. 그렇다면 송년회를 해 보자 하며 남편과 밖으로 나왔다. 밤 10시가 가까워지고 있던 시간이라, 간단히 편의점을 가기로 했는데, 편의점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사고 보니, ‘간단히 편의점’이 아니었다. 떡볶이에, 샌드위치, 햄버거 등등을 가슴 가득 안고 (봉투에는 안 담는다, 안고 가야 제맛) 집으로 돌아와서 마구 마구 전자렌지를 돌려 전자파가 완성해 준 음식을 먹었다. 특별할 것 없는 소소한 일상으로 한해의 마침표를 힘 빼고 찍는 기분이었다. 너무 힘 주어 찍으면 연필심만 부러지니까, 한해의 마지막을 거창하게 하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저 별 탈 없이 순조롭게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다음 날 아침, 눈이 아직 있을까 궁금해 하며 바깥을 보았다. 눈은 아직 있었다. 그런데 좀 달라져 있었다. 눈 위에 수많은 발자국이, 썰매 자국이 있었다. 분주하지만 즐겁게 보낸 사람들의 하루가 눈 위에 남겨져 있었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찾아와 준 하얀 눈 덕분에 사람들은 한해의 끝에 마음껏 웃는 날을 선물 받았을 것이다. 그 발자국과 썰매 자국들이, 마치 하얀 헝겊 위에 수가 놓인 것처럼 보였다.


‘수나롭다’는 ‘무엇을 하는 데 어려움이 없이 순조롭다, 정상적인 상태로 순탄하다’라는 뜻이다. 눈 오는 그날 내 하루가 순조로웠고, 사람들은 마음껏 하루를 즐겼다. 그들의 하루가 눈밭에 수 놓아 있으니, 수가 나 있으니, 수나롭다고 말하나 보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스스로의 노력과 누군가의 애정, 그리고 정성이 한땀 한땀 바느질 되어 마음에 남게 되면, 수나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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