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분갈이를 했다. 지난겨울, 집들이 온 친구가 몬스테라를 선물로 주었다. 식물들은 요상하게도 우리 집에만 들어오면 기운을 쓰지 못하고 죽어가기 일쑤였던 터라, 환한 표정으로 화분을 받아들면서도 머릿속에는 ‘이걸 또 어쩌지?’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친구가 “이거 물 한번 흠뻑 주래”라고 말했다. 나는 화분을 들고, 화장실에 갔고, 손바가지로 물을 조금씩 퍼다가 화분 흙을 적셨다. 그랬더니 뒤따라 들어온 친구가 “엇, 이거 얼마 못 가겠는데?!”라고 농담을 하며, 욕조에 넣고 샤워기로 물을 주면 된다고 시범을 보여 주었다.
그렇게 위태롭게 첫 발을 내디딘 몬스테라를 꼭 살려내고 싶었다. 우리집에 들어온 몬스테라는, 여름을 지나 잘 버텨오다가 얼마 전부터 줄기가 축축 처지길래, 뭐가 문제일까 생각하며 아침마다 화분 앞에 부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줄기끼리 묶어 보기도 하였으나, 문제는 흙에 있는 것 같았다. 지지하는 흙이 얼마 없으니 아래로 축 쳐지는 것이리라. 그래서 화분갈이를 했던 거였다.
시험 기간에 방청소를 하는 심리가 딱 이런 것일까. 난 해야 하는 일이 너무도 많았지만, 책상에 앉기까지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렸다. 설거지도 한 판 하고, 청소기도 돌리고, 심지어 어제는 집에 있는 모든 수저를 모아다 냄비에 넣고 팔팔 끓인 후, 마른 행주로 싹싹 닦아 놓았다. 자주 가는 코스모스 떡볶이집의 사장님이 이렇게 하시던 걸 기억했다가 고대로 했다. 화장대의 쓰러져 있는 화장품들을 다 세워 놓고, 덜 쓰는 것 위에 자주 쓰는 것을 올려 놓았다. 물기를 쫙쫙 빨아들인다는 스펀지까지 구매해서 화장실 세면대, 싱크대 물기까지 싹 닦았다. 변기 안 청소까지 다 한 후에는 화장실 거울까지 싹 닦았다. 그러고 나서 화분갈이까지 했던 것이다.
일하기 싫은 마음이 또 다른 일을 만들어내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것까지만 하고 진짜 책상에 앉겠다는 마음으로 화분에 흙을 채우고 꾹꾹 누르고 있는데, 우리말 ‘화수분’이 떠올랐다. ‘화수분’은 ‘재물이 계속 나오는 보물단지’를 말한다. 문학 작품에서나 쓰일 법한 이 단어가 화분갈이를 하면서 떠올랐다. 그러면서 문득 이 화분이 ‘화수분’이 되어, 나 대신 일해 줄 사람이 그것에서 슝슝 나와 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화수분에서 나온 사람들이 책상 앞에 앉아 일을 대신해 주면, 나는 커피 한 잔 내려서 홀짝홀짝 마시며 햇볕을 좀 쬘 수 있을 텐데…
‘화수분’을 제목으로 한 소설도 있다. ‘화수분’은 문학 작품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하다. ‘화수분’의 의미는 부유함에 가깝지만, 반어적으로 소설 속 인물은 극심한 가난에 시달린다. 옛 조상님들이 ‘화수분’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낸 것도, 그들이 늘 가난하게 살다 보니, 상상으로라도 부유함을 꿈꾸었기 때문일 것이다. 쌀이 나오는 항아리, 엽전이 나오는 항아리 들을 상상하며 그것을 지칭한 단어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흥부의 박에서 쌀과 보물이 넘쳐 나게 그려진 것도 이런 생각들이 반영되었을 거다.
일용할 양식, 돈, 내 일을 도와줄 사람… 화수분에서 얻고 싶은 것이 사람마다 다르고, 그것들을 원하는 마음에도 공감이 어렵지 않다. 그런데 지금 화분갈이를 하며 생각한 것은, 이 ‘화분’이 ‘화수분’이 되어 계속 뿜어져 나왔으면 하는 것은, 바로 ‘생명력’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야 몬스테라를 안 죽이고 계속 함께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요즘 우리는, 열정 있으면 누군가 나를 부려 먹을까 봐 걱정이고,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 노력 자체에 회의가 드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쉽게 번아웃되고, 무기력해지고, 시니컬해진다. 활력이 넘치던 사람들도 그런 분위기 속에서는 쉽게 생기를 잃어가기도 한다. 우리에게 ‘화수분’이 하나씩 생긴다면, 가슴팍에 하나씩 묻어 두고, 샘솟는 생명력을 끊임없이 공급받았으면 좋겠다.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감동하는, 생동감 넘치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