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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선희 Mar 27. 2024

노나줄 마음

어렸을 적 교회 선생님이 더위 사냥 하드를 하나 주시면서 친구랑 “노나 먹어.”라고 말씀하셨다. 대충 나눠 먹으라는 말인 줄은 알아들었다. 그러면서 ‘노나 먹으라고? 선생님이 사투리를 쓰시나 보네.’라고 생각했었다. 그 후 국어 전공자의 삶을 살면서 ‘노느다’는 하나의 명명백백한 표준어로서 당당하게 국어사전 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노느다’는 ‘여러 몫으로 갈라 나누다.’라는 뜻이다. 아이들에게 간식을 나눠 주며 ‘노나 먹어라.’라고 이야기하면 아이들도 옛날의 나처럼 그렇게 반응할지도 모르겠다.


지난 일요일, 느지막이 일어나 <동물농장>을 보고, 라면을 끓여 먹은 후, 분리수거 하러 나갈 때 그래도 세수는 좀 하자는 마음으로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한 마디, ‘아 맞다, 점심 약속’. 나는 점심 약속을 까맣게 잊고 그토록 여유로운 아침을 맞이했던 것이다. 전날까지 이 약속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고, 심지어 내가 어디로 널 태우러 가겠다는 꼴값까지 떨어 놓고 정작 당일 아침에 까맣게 약속을 잊다니. 미안한 마음도 컸지만, 내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아닌지 하는 생각까지 들어 두려웠다. 지난주에 이미 약속 하나를 까먹었던 경험이 있는 터라 더욱 깜짝 놀랐다. 결국 머리도 못 감고 모자를 눌러 쓴 채 약속 장소로 달려 나갔다. 다행히도 내 친구들은 “너 요즘 바빠서 그래.”라며 날 이해해 주었다. (고마워)


순간, 지난주에 끝난 강의 촬영과 자격증 시험 등등 여러 개로 노나 쓰인 나를 떠올렸다. 특히 강의 촬영에서 나는 순간 암기력을 발휘해야 한다. 강의 내용 중 중요한 단어들을 빈칸으로 만들어 놓고, 그 빈칸에 해당 단어를 쓰면서 수업을 진행해야 하는데, 빈칸에 들어갈 단어들이 미묘하게 달라져 애를 먹었다. 첫 번째 슬라이드에서는 ‘친밀감’이었던 것이, 두 번째 슬라이드에서는  ‘친근감’이었고, 한 슬라이드 안에 ‘성장’, ‘성숙’, ‘성찰’이라는 단어가 연달아 있기도 해서 외우기 까다로웠다. 내가 만든 슬라이드라면 유연하게 단어를 조금씩 바꾸기도 하겠지만, 교과서 내용을 바탕으로 잘 짜인 내용을 제대로 전달해야 하는 게 나의 입장이므로, 초집중하여 촬영을 마무리했었다. 또 자격증 시험을 보고 나면 어떤 내용이 나왔는지 유튜브 영상으로 찍고 있는데, 그러려면 시험을 보고 그 내용을 수험표 뒤에 간단하게 적은 뒤, 머릿속으로 꽤 많은 내용을 암기해서 나와야 한다.


이렇게 저렇게 암기하는 것으로 머리를 노나 쓰고 있으니, 주변 사람들에게 너그럽게 노나줄 마음 같은 건 기대하기 어렵다. 선거 기간이 되면서 자꾸 걸려오는 설문조사 전화에, 누구를 뽑아야 한다는 집안 어른들의 말에, 누가 환승연애를 했다더라 하는 가십기사들에, 짜증부터 났다. SNS를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주변에서 떠들어 대는 말들에, 난 아무 상관 없는 입장인데도 참으로 지겨웠다. 관심을 주며 노나줄 마음 없이 ‘노나(너나) 잘하세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글도 잘 써지지 않았다. 글에도 노나줄 마음이 없었던 건가. 글에게만큼은 마음을 마음껏 노나주고 니나노 하고 싶은데…. 자판에서 손을 떼고, 다음 날 중학생들과 함께 볼 시문학 문제집을 꺼냈다. 거기에서 아주 멋진 말을 발견했다. 다음 글에 쓸 소재로 고이 간직해 두었다. 이 마음 저 마음 노나져 있어 피곤했는데, 때론 노나져 있어 좋은 점도 있구나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글을 잘 쓰고 싶은 한 작가 지망생에게 ‘국어 선생님’이라는 역할은 노나져 있는 역할이겠지만, 둘 사이의 연결 고리가 생기니, 마음이 명확해지고, 문제가 해결된 듯했다. 노나져 있는 삶 속에서 많은 글감을 찾을 수 있으니. 선생님으로, 쓰는 사람으로, 딸로, 아내로, 친구로… 노나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어느 하나에 힘을 쏟으면 다른 것에 소홀해질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노’나’진 마음 안에 ‘나’는 분명 있었고, ‘나’를 매개로 연결 고리를 잡아 나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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