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적된 노하우로 안전을 담보하는 기술력을 보여줄 때다.
배터리 개발의 중심은 시대에 따라 변해 왔다. 처음 전기차 출시되었을 때는 주행 거리가 내연기관 차 대비 턱없이 부족했다. 200km 남짓한 거리로는 상용화가 없다는 시장의 지적에 저마다 에너지 밀도를 높이는데 개발의 방향을 집중했다. 그런 바람을 타고 국내 배터리 3사는 NCM 배터리 개발에 성공했고 2020년 초반까지는 시장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루었다.
그러나 전기차 전용 플랫폼이 일반화되고 차에 들어가는 셀의 부피가 늘어나면서 주행 거리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이 되자 주제는 가격으로 넘어간다. 특히 신차 내 전기차의 비중이 10%를 넘어서게 되면서 신기술을 쉽게 받아들이는 얼리 어댑터들을 넘어서서 일반 소비자를 설득하기에는 전기차가 너무 비쌌다. 때 마침 보조금까지 점점 줄어들면서 전기차 개발의 헤게모니는 누가 더 가성비가 좋은 배터리를 만들 수 있는지도 옮겨 가게 된다. 그렇게 2023년부터 지금까지의 배터리 시장은 LFP 기술과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바탕으로 한 중국 배터리 업체들이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이미 CATL과 BYD의 점유율이 50%를 넘겼고 KWH 당 배터리 가격의 격차도 지금 따라 잡기는 쉽지 않은 상태다.
그런 상황에서 인천 청라 지구 전기차 화재가 터졌다. 사실 이전에도 전기차 화재 위험에 대해서 여러 우려가 있었지만, 실제로 자동차에서 화재가 나는 비율 자체는 내연기관차가 더 높다는 논리가 더 강했다. 불이 나는 상황도 사고가 나거나, 충전을 너무 과하게 하거나, 충전 단자가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을 때로 한정된다고 여겨졌다. 아무래도 연소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 전기차가 적어도 열역학적으로는 더 안전하다고 변호해 왔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전기차가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드러났다. 먼저 보통 자동차 화재는 운전자가 탑승한 상태에서 일어나서 초기 대응이 가능한데 이번 사건은 주차한 후 며칠 후에 발생하다 보니 대응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배터리 내에 축적되어 있는 화학 에너지는 산소를 차단하더라도 불이 쉽게 꺼지지 않아 한 번 화재가 나면 주변에 피해가 크게 난다. 그리고 2022년에 제정된 공동주택 충전기 의무설치 규정에 따라서 전체 주차 면적에 2% 이상을 충전기를 설치하도록 하고 있다. 전기차만 주차할 수 있는 충전기는 대부분 지하 최하층의 구석에 위해 있다. 사고가 발생하면 청라 사태처럼 아파트 공동 주택 전체에 피해를 줄 가능성이 있다.
화재가 발생한 차의 배터리 회사가 중국의 10위권 차량이라는 보도가 나오면서 배터리 공급사를 공개해라는 식으로 논의는 흘러가고 있다. 하지만 사실 어떤 자동차의 배터리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양산 품질이 충분히 관리되고 있더라도 주행 중에 물리적 충격이나 충전 중에 전기적 충격에 영향을 받으면 어느 배터리든 상태가 안 좋아질 수도 있다. 어느 배터리 회사 제품인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배터리의 상태를 어떻게 모니터링하고 이상 현상이 발생하면 어떻게 미리 진단해서 안전한 주행이 가능하거나 수리를 받도록 유도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검증이 있어야 한다.
이런 우려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까지는 수면 아래에 있었던 화재 위험성이 부각되면서 리스본공항 주차장 사고나 중국에서의 전기차 화재 사고 등이 크게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 우리나라가 가장 빨리 이슈가 되지만 어디서든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일단 어디든 검증하는 절차가 규제로 공식화되면 인증의 영역으로 빠른 시간 내에 전 세계 전기차 시장의 안전 기준이 상향될 것이다. 바야흐로 안전하게 생산되고 안전하게 모니터링되고 화재가 발생해도 피해가 적은 배터리를 생산해야 판매할 수 있는 시대가 올 수 있다는 의미다.
그렇게 보면, 내연기관보다 전기차가 더 간단하고 더 만들기 쉽다는 전기차에 대한 명제에 의문이 생긴다.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RC카는 간단하지만, 그것이 사람이 타고 달리는 에너지 덩어리라면, 그래서 사고가 잘 안 나더라도 한번 사고가 나면 생명이 위험하거나 혹은 손해 배상 이슈로 자동차 보험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 재정적 위기에 빠질 위험이 있는 장치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안전에 대한 고민과 기술들이 축적되어야 하지 않을까?
1990년대에도 EU4 같은 배기가스 규제가 엄격해 지자 보쉬나 덴소 같은 기술력 있는 부품 업체들이 배기가스 규제를 만족하는 내연기관 시스템을 만들 수 있는 기술로 자동차 산업을 주도했었다. 가격 경쟁력에 밀려 중국 배터리 회사들에게 전기차 개발의 리더십을 놓치고 있는 지금, 인천에서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우리에게 새로운 숙제를 주고 있다. 쉽게만 보였던 전기차 개발에 다가온 기술 장벽을 슬기롭게 넘어서는 도전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규모는 뒤쳐졌지만 사실 경험은 우리가 더 많이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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