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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

식사는 평화로운 것

by 보통의 기록


아점, 브런치를 우리식으로 표현한 단어다. ‘브런치’는 아침과 점심 그 언저리에 먹을 수 있는 식사라 아침과 점심의 앞글자를 따서 만든 영단어다. 그리고 ‘아점’은 그 원리를 정확히 간파해 만든 우리식 외국어다.


아점을 먹는다는 것은 곧 여유로운 일과가 가능한 날을 의미한다. 음식을 입에 넣으며 시계를 들여다 볼 필요도 없고, 식사 이후 해야할 일을 머리속으로 되뇌일 필요도 없다. 물론, 허겁지겁 전화를 받지 않아도 되고, 밥을 먹는 건지 일을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기분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최근 서울 근교에서 2박 3일 간 북스테이를 한 적 있다. 책을 읽으며 잠도 자고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주는 시스템인데 이 곳에서 먹었던 아점을 잊지 못한다. 전날 나는 연차를 쓰고 그곳에 당도했지만 마무리짓지 못한 일을 끝내느라고, 그리고 ‘그래도 북스테이에 왔으니 책을 읽어야겠다’는 반쯤되는 오기를 부리며 늦게 몸을 침대에 뉘였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떠 방문을 열고 나가니 캄캄했던 전날 밤과 달리, 맑은 초가을 햇살과 시원한 가을 바람이 거실로 솔솔 불어왔다. 고양이들은 평화롭게 평상에 누워 털을 핥고 있었다. 멍하니 밖을 내다보았다. 눈을 감고 앉아있는 자리 사방으로 둘러싸인 책장에서 스며나오는 책 냄새와 마당에서 불어들어오는 풀냄새를 맡았고, 지저귀는 새소리에 귀를 열었다.


주인장께서 준비해주신 아점은 동네 빵집에서 사온 크로아상과 앙버터 샌드위치, 직접만든 브로콜리 스프와 유자소스를 곁들인 샐러드였는데 맛은 물론이거니와 평화롭고 평안했다. 천천히 소가 여물을 씹듯 뺑을 베어물고 씹었는데 맛있었다. 입 안에서 거친 빵 결이 으스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버터가 녹자 달콤 짭짤한 맛과 향이 입 속을 헤집고, 이내 코끗으로 올라왔다. 스프 속 잘게 썬 당근과 브로콜리가 건강하게 입에서 아삭거렸다.


평화로웠다. 평화로운 아점이었다. 식사에도 평화롭다 혹은 평안하다는 표현을 쓸 수 있나? 순간 의아해서 갸우뚱했다. ‘평화로운 아점’, ‘평화로운 식사’ 구글링을 했더니 관련 게시글과 영상들이 주르륵 나왔다. 맞다. 식사는 원래 평화로운 것이고, 평화로워야 식사다. 그래. 아이고.


일에 치이고 밀리는 현실이 일상이 되어버리는 것을 경계하지 못한 채 몇 주를 살았다. 반성했다. 식사는 원래 그저 먹는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여유롭게 맛을 음미하고 내 마음과 주변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과연 그것이 무엇을 위한 삶 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깨달음의 순간 또한 쉴 때 찾아온다.


현대인의 삶은 ‘내’가 밀리기 십상인 구조에 끼여있다. 그래서 개인을 돌볼 겨를이 부족하고 여유가 없다. 구조는 모든 부분과 요소들이 다 얼개를 짜고 있으니 쉽사리 바뀔 수 없다. 하지만 그 구조 속에 사는 나는 내 자신을 돌볼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은 빠르고 냉정하기에 우리는 평안함과 평화로움을 상실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언젠가 정반합의 원리로 결국 합의에 도달하게 될테니까.


햇살 좋은 날, 멍을 때리며 브런치, 아점을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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