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퇴사를 해야 할까.
퇴사 전 진짜 알아야 할 것
회사를 들어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름대로 원하던 회사에 들어갔고 내게는 큰 성취였다. 그렇기에 나 역시 퇴사를 앞두고 수없이 저울 앞에 서야 했다. 가장 먼저 저울의 양팔에 올려놓은 것은 돈이었다. 숫자로 딱 떨어지는 급여는 별다른 고민 없이도 바로 비교할 수 있다. 한 달에 얼마를 받고, 연간 얼마를 벌고, 회사에서 간접적으로 받는 복지는 얼마 정도 되는지 30분이면 정리를 마칠 수 있다. 회사를 그만두면 돈을 벌기는커녕 새로운 것을 배우기 위해 어느 정도 지출이 발생하고 아무것도 안 한다 해도 매달 최소 생활비를 감당해야 한다. 그러니 저울의 양팔은 의미가 없을 만큼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퇴사를 고민할 때 객관적으로 퇴사가 좋은 선택이라고 말해주는 지표는 아무것도 없다. 돈은 누구에게나 객관적으로 작용하는 강력한 통화지만, 시간이나 꿈, 가능성은 널리 통용되지 않는 화폐이기 때문이다. 진지하게 생각하면 할수록 수많은 사람이 현재의 삶에 그다지 만족하지 않으면서도 같은 방식의 삶을 이어나가는 이유에 대해서만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불만족스러운 삶이 지속되자, 나는 점점 다른 요인들을 수식에 넣기 시작했다.
돈만큼 유한한 것이 시간이다. 어느 여름날 나는 전화를 받으러 사무실을 나왔다. 유난히 푸르른 나무가 바람에 살랑이고 표면마다 여름의 햇살이 내려앉아 있었다. 짙은 파란색 하늘 아래 뭉게구름 하나가 둥실 떠다녔다. 바로 내 곁에 있었으나 발견하지 못했던 풍경에 마음이 조금 쌀쌀해졌다. 일 년에 이렇게 완벽한 날은 며칠이나 될까, 회사에 다니며 이런 하루를 온전히 즐길 수 있는 날은 또 며칠이나 될까, 365일 중 열흘은 될까 싶었다. 사무실 유리 안쪽 시간은 사계절 구분이 없이 흘러갔고 황금 같은 날씨는 주말을 맞춰 오는 법이 없었다. 여행을 좋아하던 친구는 딱 한 달만 회사를 쉬고 여행을 다니면 소원이 없겠다고 했다. 일주일 내로 서둘러 다녀와야 하는 여행이 아닌, 좀 더 멀리 더 오래 여행다운 여행을 한 번만 더 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그건 불가능하다. 회사원의 삶은 단 한 달의 시간적 자유도 허용하지 않는다. 회사가 주는 안정감을 얻기 위해 딱 그만큼의 자유를 지불하고 있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많은 사람이 회사에 다니다 보면 성격이 변한다고 말한다. 그중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바로 '내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된다', '마음을 닫게 된다'라는 것이었다. 나 역시 같은 순서를 밟았다. 회사에 다니면 나와 너무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게 된다. 내가 한 말들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다양하게 해석되고, 말을 통해 나를 평가하고 분석하려는 시도를 느낀다. 그러다 보니 말을 아끼게 되고 대화에서 나에 관한 이야기를 배제하게 된다. 지나친 관심과 동시에 무관심을 느낀다. 관심으로 묻고 관심으로 대답하는 보통의 회화와 다르게, 서로에게 무관심한 사람들끼리 질문을 건네고 답을 듣는다. 너무 많은 질문이 오고 가지만 누구도 귀담아듣지 않는 대화가 흔하다. 그러니 더더욱 정성 들여 내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어진다. 처음에는 이런 대화가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가고 그런 대화가 익숙해지다 보니 나도 알맹이 없는 질문, 알맹이 없는 대답을 자주 하게 됐다. 친구와 대화할 때조차 내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는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다.
'평생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가'라는 고민을 멈출 수 없었다. 이 고민은 자연스럽게 나는 어떤 사람인가, 어디서 만족을 얻는가, 나에게 이로운 것,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로 이어졌고 스스로에 대해 전에 없이 깊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렇게 나와 친해지고 나니 복잡한 수식은 훨씬 간단해졌다. 계산에 들어가는 모든 항목이 철저하게 주관적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퇴사하고 얻는 시간에 무엇을 할지, 그 일은 나에게 왜 중요한지 알고 나니 시간의 가치가 다르게 보였다. 마찬가지로 없어질 소득은 원래 어떻게 쓸 예정이었고, 그 소비가 나에게 어떤 만족감을 주는지 알고 나니 감수해야 하는 것의 무게를 알게 되었다.
사람마다 사정이 다 다르다. 소비를 통해 얻는 만족감이 훨씬 큰 사람도 있고, 안정감이 필요한 사람도 있다. 가정이 있거나 부모님을 모셔야 해서 변화를 선택하기 힘들 수도 있고, 건강이 나빠 삶을 재설계해야 하는 사람도 있다. 이 모든 판단은 각자의 상황에 따라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나의 경우는 '시도를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나'라는 항목이 큰 점수를 벌어다 줬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남들보다 조금 일찍, 그리고 별다른 확신 없이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해보지 못한 시도에 대한 결핍이 늘 자리하고 있었다. 기회비용을 지불하고 얻은 시간을 통해 원하는 목표를 이룬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실패로 돌아간다 해도 주도적으로 시도하고 노력한 시간을 통해 결핍을 해소하고 이후의 삶에 만족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회사보다 나쁜 조건의 회사에 다니게 될 수도 있다. 힘들게 쌓은 경력은 무로 돌아가고 다시 신입사원으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암묵적인 나이 제한으로 재취업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새로운 시도는 전혀 다른 삶으로 가는 문을 열어줄 수도 있다. 객관적으로 더 나은 삶을 얻지는 못해도 주관적으로 더 나은 삶은 얼마든지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자 선택은 쉬워졌다.
결론은, 실패로 돌아갈지라도 나에게 이롭다는 생각이 든다면 시도할 때라고 본다. 그리고 그 이롭다는 감각은 지극히 주관적인 가치 판단을 전제로 한다. 주관이 부족한 상태에서 결정을 내리면 후회할 수 있기에 결정을 내리기 전 자기 자신에 대해 충분히 생각해봐야 한다. 그런 과정을 거쳐 단단해져야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삶을 살든 확신 가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