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오기 시작했다.
올해의 첫눈은 커다란 눈송이로 말 그대로 펑펑 내렸다.
엊그제만 해도 그리 춥지 않은 날씨에 눈이 쌓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금세 아주 많이 쌓였다.
눈이 쌓이면 뛰어나가던 나이가, 야속하게도 지나버렸다. 눈이 쌓이니 밖으로 나가 해야 했던 일들에 제약이 생기고, 창문 밖으로 들리는 경적 소리와 매서운 사이렌 소리, 쌓인 눈을 긁는 청소 소리가 오히려 혀를 끌끌 차게 했다.
어릴 적 눈이 쌓이는 것은 행복한 추억을 만들 수 있었지만, 지금의 내게 눈이 쌓이는 것은 영 번거롭고 불편한 일이 돼버렸다.
9살이 되던 해, 눈이 엄청 쌓여서 스키복 같은 두터운 옷을 위아래로 챙겨 입고 물에는 끄떡없는 장갑을 낀 채 무작정 공원으로 나갔다. 핸드폰도 없었는데, 이미 공원에는 친구들이 가득했다. 멀리서 나를 부르는 소리에 한달음에 달려갔다.
어디선가 주워온 포대 자루와 무척 높게 느껴졌던 언덕의 능선을 타고 내려갔다가 다시 낑낑대며 올라왔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한참을 타고, 물에 끄떡없던 장갑 너머로 손이 시려오기 시작할 때 친구들과 나는 공원 앞 분식점으로 달려갔다. 분식점 아주머니는 우리에게 어묵 국물을 종이컵에 받아 나눠 주었다. 그것도 무료로 말이다.
우리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어묵 국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또 받으러 가서는 각자 엄마한테는 비밀로 하자면서 장갑에 어묵 국물을 서로 부어줬다. 푹 젖은 흙냄새와 포대 자루에서 나는 건초 냄새, 손에 담긴 비릿한 냄새까지…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푹 내게 쌓여있다.
아주 어릴 적에 쌓여있던 기억들은 참 풋풋하고 순수했던, 그렇기에 좋은 기억들과 감정이 많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 쌓인 것을 정리하다 보니 지난주, 지난달, 지난해… 최근 내 마음에 쌓인 것들은 하나같이 날이 서고 불쾌했던 것들이 더 많이 남아있었다.
그런 것 같다. 쌓인다는 것.
마음에 쌓이는 일들은 나이가 익어감에 따라 그 모습이 변해가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누구로부터 시작됐는지… 한참을 쫓아가니 결국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깨달은 지금부터 새롭게 쌓아가면 된다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어제만 해도 지저분했던 도로가 영 거슬렸는데 오늘 쌓인 저 눈이 도로를 하얗게, 깨끗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도 분명히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어린 시절에 눈과 함께했던 기억이 아름다울 수 있는 건, 지금 불편하게 느끼는 것으로 인해 쌓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람도, 사랑도
그렇게 좋은 점, 나쁜 점 뒤섞여가며 앞서라 뒤서라 쌓이고 있다고. 마냥 좋을 수만 없기에, 좋은 부분을 더 쌓아보며 살아가야겠다고.
창문 밖에 두터운 옷을 위아래로 입은 아이들이 뛰어다닌다. 한 아이가 넘어졌고 그 넘어진 아이에게 다른 아이는 손가락질하며 서로 배꼽을 잡고 웃는다.
저 아이들에게 오늘의 눈이, 오늘의 시간이 잘 쌓이길 바란다.
오늘, 눈이 참 따뜻하게 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