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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임 Jun 21. 2021

18. 뻔한 눈물

언젠가는 나의 것이 될

슬기로운 의사생활


  남편이 자꾸 물었다. 왜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안 보냐고. 곧 시즌 2가 시작되는데 얼른 시즌 1을 봐 두라고. 정말 괜찮은 드라마라고. 그래서 시즌 1 정주행을 시작했고, 마쳤다. 그랬다. 괜찮은 드라마였다. 딱히 어디 흠잡을 만한 것이 없는 괜찮은 드라마였는데 나는, 그저 그랬다. 그냥 그렇구나 했다.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은 사람들 이야기를 좀 따뜻하고 재미있게 그려냈구나 했다. 그리고 좀, 불편했다.



  거의 매회 나오는 눈물을 흘리게 하는 장면들이 불편했다. 병원 드라마니까 그런 내용이 안 들어갈 수는 없겠지. 병원이라는 곳이 아픈 몸을 고쳐서 나가는 희망적인 곳이기도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들도 무수히 많이 일어나니까 말이다. 아직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병과 싸우다 결국 엄마 곁을 떠나는 아기 이야기, 이제 정말 희망이 없다는 의사의 말에 의식 없는 장성한 아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보게 해 달라는 늙은 엄마의 떨리는 목소리, 어제 멀쩡히 퇴원해 아이와 어린이날을 보내러 갔다가 사고로 뇌사상태가 되어 다시 병원에 실려온 아빠, 어렵게 어렵게 품은 아기를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보내줘야 하는 엄마...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은 절대 익숙해질 수 없고 마음의 준비라는 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 짓이었나를 일깨워주는 사건이다. 그 순간이 되어야지만 느껴지는 감정들이 있다. 그 순간에 닿았을 때 비로소 찾아오는 감정들이 있다. 대체로 하염없이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동반하고 말이다. 가짜인 줄, 연기인 줄 알지만 드라마를 보는 나도 덩달아 울고 만다.



  뻔한 눈물이라 이름을 붙였다. 자, 이쯤에서 눈물을 한 번 흘리고 가시지요, 하고 만들어 놓은 상황들에서 나온 눈물 말이다. 뭔가 굉장히 불편한 마음이지만 나는 드라마를 만든 사람들의 기대에 적극 부응했다. 왜 불편하지, 뭐가 불편한 거지, 하고 계속 생각하다가 다른 드라마를 정주행하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내리는 일 억 개의 별」 이 드라마를 보면서 정말 잘 만든 드라마라고 남편에게 강력추천했다. 정주행을 마치고 인스타에도 소문냈다. 다들 꼭 보시라고. 이 드라마의 마지막 회를 보면서 나는 또 눈물을 한 바가지 흘렸다. 그런데 이번에 흘린 눈물은 가슴 아리게 슬펐지만 불편하지는 않았다. 왜 그렇지, 이건 뭐지. 뻔하지 않은 눈물이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보면서 흘린 눈물은 뻔한 눈물이었다. 언제든지 내가 저 상황에 놓여 진짜 나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이야기였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겪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내가 보호자가 되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낼 수도 있고, 내가 떠나야 하는 순간도 언젠가는 온다. 드라마에 나오는 의사들처럼 따뜻하고 인간적인 의사를 만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헤어짐은 반드시 나에게 다가올 일이다. 그래서 그냥 남일 보듯 울고만 앉아있기 불편했다. 눈물이 나면서 저어기 가슴속 어딘가가 쓰라린 느낌이 계속 남았다.


하늘에서 내리는 일 억 개의 별


  「하늘에서 내리는 일 억 개의 별」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삶은 평범하지 않다. 어린 시절 충격적인 사건을 겪으면서 기억을 잃고, 기억을 찾아가면서 혼란을 겪고, 결국 삶이 나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이끌린 듯 비극적인 결말에 이른다. 나는 출생의 비밀이나 어린 시절 충격적 사건에 의한 기억의 일부 상실 이런 거 없는 삶이다. 출생이 확실하고, 가족들의 관계도 확실하다. 생긴 것만 봐도 아, 가족이네 할 만큼. 물론 살아오면서 삐그덕거릴 때도 있고 삶이 사포같이 까끌거릴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내 삶이 통째로 뒤흔들릴 만큼의 격랑에 휩쓸릴 만한 사건은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지금까지와 크게 다를 바 없겠지 하는 것이 나의 섣부른 추측이다. 마지막 회에서 밝혀진 주인공들의 삶이 너무나도 기고하고 안타깝고 슬퍼서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렀지만 불편하지 않았던 것은 난 그들과 같은 혼돈의 삶을 겪을 일이 없으리라는 믿음에서 오는 것이었다. 물론 미래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멀찍이 떨어져서 나와는 상관없다는 믿음 아래 나와 삶의 결이 완전히 다른 사람의 인생을 보며 안타까워하고 있는 내가 좀 못되게 느껴졌다. 그것도 잠시, 화면을 끄는 순간 잠시 나를 비난했던 생각도 함께 꺼졌다.



철저하게 이기적인 인간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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