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비가 잠깐 내리는 것 같더니 뚝 끊겼다. 우리는 이화령을 오르기 시작했다. 모이는 장소는 이화령 꼭대기. 모두 각자의 속도대로 오르기 시작했다. 타고 올라가는 사람, 끌고 올라가는 사람, 밀고 올라가는 사람. 나는 밀고 올라가는 사람. 꼭대기까지 거리가 약 7km였으니까 두 시간은 각오해야겠구나. 얘들아, 미안하지만 최소 40~50분은 나를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오가는 차는 많지 않았다. 아니, 거의 없었다고 하는 게 맞겠다. 중간에 오른쪽 바깥 아래를 보니 직선도로를 시원하게 달리는 차들이 보였다. 대관령처럼 여기도 터널이 뚫리면서 통행량이 확 줄어들었구나. 줄어든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다고 봐야겠구나. 그 덕분에 우리가 차 걱정은 할 필요가 없게 됐지만.
차는 많지 않았지만 반대편에서 내려오는 자전거여행자들이 간간이 보였다. 그렇게 쭉 내려오는 사람들이 있으면 꼭 하는 게 있었다. 그게 바로 인사다. 나는 자전거길 인사를 이번 여행길에 배웠다. 종주를 시작한 첫날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들 중에 '안녕하세요!'라거나 '화이팅!'이라고 인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가 마주친 건 1초나 될까. 하지만 그 인사는 하루종일 힘이 됐다. 그래서 나도 그 인사를 돌려주고 싶었다. 반대편을 바라보다가 눈만 마주치면 인사를 했다. 하다 못해 목례라도. 인사인 동시에 응원이었다. 상대에 대한 응원 그리고 우리에 대한 응원.
구불구불 올라가는데 영아지고개가 떠올랐다. 영아지 고개의 확장판이구나. 얼마 동안 가다가 보니 나무 울타리 때문인지 착시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몸은 올라가는데 마치 내리막길을 걷는 것 같은 착각. 제주도에 있는 도깨비도로라는 게 이런 건가. (나는 사실 제주도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내 눈은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구나.
중간에 휴식 지점에서 달팽이 선생님이 음료나 간식을 들고 기다리셨다. 마라톤 중간에 마시는 한 모금 물처럼 달콤했다. 그나저나 이게 언제 끝나나. 꼭대기까지 남은 거리가 점점 줄어들었고 길보다 하늘이 눈에 더 많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상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
이제 다 왔다. 달팽이 선생님은 차를 미리 정상 쪽에 세워놓고 영상을 찍고 계셨다. '파이팅!'을 계속 외치시면서. 드디어 도착. 콜라 좀 줘. 뭐든 마실 것 좀. 먼저 도착한 학생들한테 들으니 40~50분 정도 차이가 날 줄 알았더니 20분 정도 차이가 났단다. 이 정도면 선방했다. 가장 큰 일을 해낸 것 같았다. 가장 큰 고비를 넘긴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내리막길에서 긴장을 풀면 안 된다. 여기서부터 수안보온천인증센터까지 쭉 간다. 길이는 18km 정도. 내리막길에서는 가장 긴장도가 높은 (안전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 내가 앞장을 섰다.
내리막길은 오르막을 힘들게 올라간 우리를 위해 보상을 해주었다. 아주 속이 시원했다. 차도 안 다니는 도로 위를 전세라도 낸 것처럼. 아까 우리가 낑낑거리며 올라가고 있을 때 내려오던 사람들이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어느 정도 내려가다가 나는 속도를 내어 학생들을 따돌렸다. 뭐 그동안 뒤처진 서러움을 갚자고 그런 건 아니다. 사진과 영상을 찍어야 해서 그랬다. 내 앞을 시원하게들 지나쳐갔고 나는 다시 맨 뒤에서 학생들을 따라갔다.
수안보온천인증센터 도착. 인증 도장을 찍고 장을 본 후에 그날 묵을 숙소를 향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숙소는 약 10km가 떨어져 있었다. 내 무릎아. 조금만 더 견디자. 내 무릎에 비해 학생들은 아주 건강해 보였다. 숙소에 도착했다. 폐교를 개조해서 캠핑장으로 쓰는 곳이었다. 마침 그날이 그 학교를 졸업한 분들의 동창회 날이라 시끌벅적했다. 모여 있는 분들을 보니 학교를 졸업한 지 최소 40~50년은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비록 캠핑장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풍경도 많이 바뀌었겠지만 돌아올 곳이 있고 모여서 추억할 곳이 있다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전거들을 세우고 건물에 들어선 그때였다. 무슨 각본이라도 짠 것처럼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냥 비가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소나기였다. 5분만 더 늦었어도 쫄딱 젖을 뻔했다. 오늘 하루는 대못으로 시작해서 소나기로 끝나는구나. 길고도 높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