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의 의. 식. 주. 시리즈 1. 그들은 어떤 옷을 입나
헨젤과 그레텔, 빨간 모자, 라푼젤, 신데렐라 같은 그림 형제의 동화책을 보면 옛날 독일 사람들은 숲에 둘러싸인 오래된 고성이나 뾰족한 지붕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에 살 것 같다. 그들은 동그란 빵과 치즈, 꿀을 즐겨먹고 산딸기 같은 과일과 크림으로 풍성하게 장식된 케이크, 먹음직스럽게 생긴 쿠키와 와인을 즐긴다. 금발의 남자들은 갈색 가죽 반바지를 입고, 여자들은 무릎까지 오는 스커트를 입고 상냥하게 미소를 띤 모습이다.
내 상상 속 독일인들의 이렇게 목가적인 생활 모습은 아쉽게도 직접 경험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옷차림이 그렇다. 현대사회를 사는 바쁜 사람들에게 허리 부분을 꽉 졸라 맨 스커트와 가죽바지가 웬 말인가. 물론, 매년 가을에 열리는 바이에른 지역의 옥토버페스트에 가면 현지인과 관광객 모두가 독일 전통 의상을 입고 한데 어울려 축제를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동화적인 독일인의 옷차림은 특별한 날이나 특정 장소에서 가야만 구경할 수 있다.
독일인들은 단정하고 검소한 옷차림을 한다. 사는 지역에 따라 그리고 개인의 취향 또는 경제적인 수준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가 본 독일 사람들은 대체로 옷차림이 수수하고 별 군더더기가 없다 (가끔은 너무 없다.) 개개인의 특성을 존중하고 외모에 많이 신경을 안 쓰는 사회 분위기가 그들의 옷차림에도 많이 묻어나는 것 같다. 물론, 모두가 다 검소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뮌헨이나 함부르크, 뒤셀도르프 같이 부유한 도시들의 쇼핑 거리를 거닐 때면 값비싼 옷과 물건으로 예쁘게 꾸민 사람들을 보며 남의 시선을 알게 모르게 의식하는 그 익숙한 분위기에 오히려 안도감?을 느낀 적도 있다. 하지만 겉모습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사람들은 소수일 뿐이고, 대다수의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이 비싼 옷을 입건 싼 옷을 입건 별로 신경을 많이 안 쓴다.
이 사람들이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한국사람들에 비해서 딱히 돈 들어갈 일이 많아 보이지도 않는데 왜 저렇게까지 옷 사는 데에 돈을 안 쓸까. 하지만 몇 년 살다 보니 알게 되었다. 이 사람들은 아웃도어 용품 구매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패션 브랜드는 없을지언정 독일에는 Deuter 나 Jack Wolfskin 같은 유명한 아웃도어 브랜드들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는 사실을 다시금 인지했다.
많은 독일인들은 기본 운동복을 포함해서, 조깅, 등산, 수영, 스키, 승마, 암벽등반 등등의 스포츠에 위한 옷과 장비들을 필요하다면 아무리 고가라도 직접 구입한다. 여가 시간과 취미를 매우 중요시하기 때문이리라. 우리나라처럼 운동복이나 신발 또는 장비를 대여해주는 곳도 없다는 사실도 한 몫하는 것 같다. 몇 년 전 한 번은 회사 동료들이랑 등산을 가기로 한 적이 있었는데, 난 그냥 평상시처럼 컨버스 운동화에 청바지를 입고 갔다가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등산화에 스포츠 레깅스를 입은 모습을 보고 놀란 적이 있었다. 심지어 나보다도 더 아웃도어 스포츠를 즐겨하지 않는 동료 몇몇조차도 모두 다 말이다. 중소 규모의 NGO 인 내 옛 직장에서 다들 풍족하지 않은 월급을 받는 것을 알고 있고, 동료들이 평소에 수수하다 못해 후줄근한 옷차림으로도 출근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봐왔으니, 직장 동료들이 아웃도어 용품을 그렇게 갖춰놓고 사는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대학생 때는, 겨울에 날이 추우면 꽤 적지 않은 수의 애들이 그냥 스키복 외투를 입고 학교를 오는 모습이 경악을 한 적도 있다. 패션 테러범이 아니고서야 누가 봐도 기능성으로만 무장한 옷을 입고 '대학교'에 온다는 거야? 하겠지만 독일인들이 그렇다. 심지어 그 외투들이 싸지도 않다. 그리고 아빠 옷도 아니고 자기 옷이다. 그냥 추운데 집에 그 외투가 마침 있으니까 입은 걸 거다. 길을 가다 보면 그놈의 Jack Wolfskin 외투 입고 출근하는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보는데, 정말 회사 가는 옷차림이다. 복장 규제가 심하지 않은 회사를 다니는 거겠지만.
솔직히 처음에는 너무나도 센세이셔널? 한 그들의 패션에 눈을 못 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옷을 입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보다는 내가 '어떤 활동을 하기 위해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가'에 초점을 훨씬 크게 두는 독일인들의 마인드를 이해하고부터는 나도 이제는 노메이크업에 편한 옷차림으로 다닐 때가 많다. 그래도 정말 모든 것을 놓아버린 것 마냥 실용적으로'만' 살기에는 아직 내공이 부족하므로, 난 그냥 내가 세속적임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냥 옷 몇 가지, 신발 몇 가지 더 사겠다.
멋은 좀 없어도, 실용성과 활동성, 가성비를 우선으로 하는 독일인들의 패션 철학에 박수를 보내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