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마음, 교감

by 김성민



지난번 편지 ‘정신과 육체의 대화’를 읽으면서 저는 엉뚱하게도 이런 생각을 했어요. 편지도 하나의 대화이니, 편지를 열 통 넘게 교환하고 있는 지금 헤븐님과 대화는 어디쯤 와 있을까. 편지가 늘어나는 만큼 거리는 좁아지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요. 헤븐님을 '헤븐'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줄었을까요? 주로 온라인에서 글로만 나누다 보니, 습관적으로 ‘–님’을 쓰지만, 소리 내어 발음해 보면, 특유의 격식에 사로잡혀 어떤 선 바깥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느낌이 들어요. 호칭 하나가 관계를 보여주고 정리한다는 사실이 때때로 경이로워요. 나이 차이나 상하 관계와 무관하게 이름을 부르는 외국 문화와 달리 한국에서는 위계질서에 따른 호칭이 익숙하니까요. 저, 제 마음대로(갑자기?) 선 넘어보려 불러봅니다. 헤븐.



단어 하나에 마음의 거리가 가까워지거나 멀어진다는 새삼스러운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마음을 나누는 데는 어떤 대단한 말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아서요. ‘정신과 육체의 대화’를 읽으면서 저는 몸의 대화가 지닌 놀라운 능력을 새삼 떠올렸거든요. (‘육체’ 대신 ‘몸’이라고 말하면 느낌이 확 달라지지 않나요? 육체라고 하면 성적인 느낌이 들지만, 몸이라고 하면, 그냥 사람, 호모 사피엔스의 몸이 연상되어요. 전적으로 저의 개인적인 느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간절한 눈빛, 어깨를 가만히 토닥이는 손길 하나가 백 마디의 말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을 경험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생각을 바꾸어 비로소 끄덕일 수 있었어요. 영화 <남과 여>에서 기홍과 상민은 누구보다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고요. 말과 말로 나누는 발화적 대화가 아닌 몸과 몸으로. 그들이 나누는 짧고 강렬한 교감이 관능적으로 표출되었음을요. 그런데, 저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들은 정말 운이 좋은 사람들이구나. 서로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복잡다단한 단계를 생략하고 단번에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는 사람들이구나. 기홍과 상민은 같은 몸의 언어를 쓰고 있었나 봐요. 어떤 해석이나 설명도 불필요한 몸의 언어를요.



남과 여가 나누는 몸의 대화에 관해 쓰려고 보니 안 그래도 더운 날씨에 더 후끈하네요. 아무래도 옆에 있는 선풍기 바람 강도를 더 높여야겠습니다. 물도 좀 마셔야겠고요. 음…. 눈치채셨다시피, 자꾸만 딴청을 피우고 있어요. 내밀하고도 은밀한 세계에 대해 제가 어떤 말을 쓸 수 있을지 난감해하면서요. 대화가 겉돌지 않고 정확한 교감이 되기 위해서 먼저 나의 언어를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나의 의사를 전달하기 전에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분명히 아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러니까 몸의 대화에 관해서는 나의 몸을 먼저 파악하고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요.



저는 요즘 몸의 언어를 부지런히 쓰고 있어요.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는 뜻이지요. 전신 거울을 긴장감 있게 응시하며 운동복 입은 모습을 오랜만에 만나고 있어요. 나의 몸에 대해 정확히 안다는 것은 유쾌하기만 한 일은 아니에요. 고장 나고 망가진 부분을 찾아내는 일 같거든요. 굽은 어깨를 펴고 등을 곧게 세우고 골반을 맞추고! 운동은 결국 불균형에서 균형을 찾는 일이 아닌가 해요. 몸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넘치는 부분을 줄이는 과정이요. 나의 몸을 정돈하는 것은 몸의 불필요한 부분을 찾아내어 과감하게 내보내는 일이 아닌가 싶어요.



거울 앞에 선 여인(1897) 툴르즈 로트렉



저를 담당해주시는 운동 선생님은 운동 시작 전에 몸을 풀어주셔요. 본격적인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 뭉친 부분을 풀어주고 근육이 놀라지 않게 깨우는 과정이랄까요? 누군가 내 몸을 부위별로 점검해 준 적이 있었나 황송해하면서 잠시 노곤해지기도 해요. 말하자면 이완의 시간이지요. 신기하게도 같은 강도로 몸을 누르는 데도 어떤 부위는 자극이 달라요. 신기하죠. 같은 사람이 같은 강도로 자극하는데 몸에서 받아들이는 반응이 제각각 다르다는 것이요.



몇 해 전, 아이 친구 엄마들과의 저녁 모임에서 부부 잠자리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어요. 신혼 첫날밤부터 섹스 리스 경험까지. 그중 기억나는 이야기는 자신의 성감대를 알고 있느냐는 물음이었는데, 매우 구체적인 경험을 털어놓는 엄마가 있었어요. 다들 공감하면서 은밀하게 각자의 성감대를 이야기하더라고요. 마치 당연히 알고 있다는 듯이요. 그 이야기에 완전히 동참하지 못하는 저를 보면서 제 자신에게 물었어요. 나를 자극하는 부위, 내 몸의 모든 신경세포를 하나하나 깨우고 모세혈관들 속 피의 순환이 활기차게 움직이게 하는 부위를, 나는 잘 알고 있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모를 부끄러움이 그동안 몸에 대해 이중적 태도를 갖게 한 것 같아요. 몸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은밀한 기쁨을 갖기 원하면서도 나는 몸과 대화하는데 소홀했구나. 몸의 언어를 낯설어하는구나. 낯설기만 한 깨달음은 아니에요. 기쁨보다 의무감을 택하는 제가 더 익숙했기 때문이겠죠. 남과 여가 나누는 성적 교감이 반드시 몸과 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만약 몸과 몸이 적극적으로 통할 수 있다면, 분명 그건 그들의 세계를 다른 차원으로 깊게 넓히는 일일 거예요.



영화가 아닌 실제에서 몸의 기쁨을 경험한 친구(이름을 밝힐 수 없으니 H라고 할게요)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몸의 기쁨은 남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여자도 가질 수 있다는 말이 기억나네요. H의 말을 들으면서 저는 그런 경험이 드물다는 사실에 제가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걸 깨달았지요. 그건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 속 대사가 아닌, 연애의 역사를 공유 해왔던 현실 속 인물의 말이었으니까요. 확실히 H는 파트너와 다른 차원의 관계에 진입하면서 새로운 대륙에 있는 것 같았어요.



편지를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생각하다가 몇 달째 제 주변에 두었던 책 미셸 푸코의 『육체의 고백』을 펼쳤어요. 제목에서 감지되는 어떤 비밀스러운 고백이 궁금해 읽어보고 싶었는데 두께의 압박으로 쉽게 펼치지 못한 책이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몸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비로소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훑어보게 되었어요. 어떤 결정적인 실마리를 기대하면서 말이지요. 『육체의 고백』은 ‘기독교 윤리의 형성과정과 육체에 대한 기독교 규범을 논의한’ 책으로 기독교가 서양인의 삶과 생활방식, 삶의 태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분석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성행위는 결과나 수단으로나 욕망, 타락, 죽음, 생식과 관련된 것이라는 말을 하는데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지요. 다만, 그 역사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는 것. 제가 그동안 몸의 기쁨을 모른 척 한 바탕이 된 부끄러움이 단순히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관습적이고 역사적이라는 것을 읽을 수 있었어요.



푸코가 『육체의 고백』을 발표한 시기가 1982년. 그로부터 40년 가까이 지났으니 강산이 네 번 변한 만큼 성 윤리나 성에 관한 태도와 가치도 많이 바뀌었지요. 이 시점에서 저는 무척 고리타분한 생각들을 늘어놓는 것 같아요. 여러 미디어의 영향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고요. 몸에 대해 쓰면서 어디까지 정신적으로 발가벗을 수 있는지, 가늠해보고 있어요. 마치 운동을 할 때 한계에 다다르면 몸이 부들부들 떨리 듯이 저는 정신적으로 조금 떨고 있는 것도 같네요.




기록적인 폭염 속에서,

민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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