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적인 '트러블'

by 김성민


답장을 쓰려고 지난 편지를 다시 열어보았어요. 편지 마지막에 ‘정신적으로 어디까지 발가벗을 수 있는지 가늠’한다고 썼더군요. 솔직하게 써보겠다는 의지를 반영한 말인데, 다시 보니 조금 민망하기도 하네요. 아니, 어쩌면 저는 이미 발가벗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왜 그런 말 있잖아요. 글을 쓴다는 건, 발가벗는 행위라고요. (맨 처음 들었을 때 산뜻했던 말도 이제는 흔하고 빛바랜 비유로 느껴지지만요) 어떤 말은 꺼내줄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누군가 은근히 물어봐 주기를 기대하는 말이요. 혼자서 꺼내기는 도저히 유치하고 낯뜨거워서 저 깊숙하게 숨겨두고 있는 생각들이지요. 그런데 어쩐지 편지에서는 그러한 검열이 조금 느슨해져요. 구체적인 수신자가 있다는 든든함, 그것이 편지의 힘 일까요? 그렇다면 편지의 힘을 빌려 조금 더 벗어볼게요.



내 몸을 가꾸고 지킨다는 건 당연히 몸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신의 일인지도 모르겠어요. 몸을 소홀하게 대했던 시절을 읽으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해소할 길 없는 답답함과 분노가 몸을 향했구나. 복부와 머리카락이, 아랫입술이 수난을 당했구나. 그때의 헤븐을 가만히 안아주고 싶었습니다. 저에게도 비슷한 습관이 있는 것 같아요. 마치 몸을 무한히 움직일 수 있을 것처럼 쓰죠. 가장 쉽게 저지르는 일은 잠을 줄이는 것이고요. 잠이 보약이라는 말을 가뿐히 무시하고 새벽까지 깨어있다가 침대로 쓰러집니다. 일어나면 당연히 몸이 무거워요. 그렇게 무거운 채로 며칠을 보내면 탈이 나곤 합니다. 몸을 만만히 보다가 몸에게 공격당하는 꼴이지요. 더 늦기 전에 몸을 잘 달래보겠습니다. 헤븐의 복부와 머리카락, 아랫입술에게도 안부를 전해요.



툴루즈 로트레크_침대에서 키스 1892.jpg 침대에서 키스 (1892) 툴루즈 로트렉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라는 말이 있어요. 이 말을 비틀어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섹스가 깃든다’라고도 바꿀 수 있을까요? 슬쩍 운을 떼었더니, 와락 받아주신 편지를 읽으면서 몸에 관한 가장 깊은 이야기로 진입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sex는 우리말로 ‘성’이라고 번역되죠.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 second sex라고 하고요. 요즘은 ‘성’이라고 하면 ‘젠더’를 같이 떠올리게 되어요. 섹스를 생물학적 성, 젠더를 사회학적 성이라고 말하는데, 이제 성에 관해서라면, 섹스와 젠더 둘 다 말해야 할 것 같거든요.


그런데 젠더가 무엇인가요? 페미니즘 물결과 더불어 젠더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지만 사실 여전히 배우는 중이에요. 페미니즘 갈래마다 관점이 달라서 같은 페미니즘 지붕 아래서 상충 되는 모습을 목격하거든요. 요즘에는 10대 소녀들도 자신들을 페미니스트라고 정의한다니 제가 보낸 10대 시절과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요. 90년대 초중학교를 다닌 사람으로서 성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있었나 생각해 보면, 과학실에서 교육용으로 제작된 비디오를 본 게 전부인 것 같아요. 기억에 거의 없는 걸 보니, 학교에서 학생들이 단체로 볼만한 내용이었나 봅니다. 부모님은 성이란 숨겨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셨고요. 마치 성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그 시대 전형적인 모습인지 모르겠지만, 성에 대한 배움을 마치 나쁜 일처럼 대하셔서 의기소침해진 적도 있어요. 아마 부모님도 자녀의 성교육 앞에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배운 적이 없으실 테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음성적으로 배웠습니다. 친구들끼리 모여서 야한 비디오를 본다든가, 성교육용 책을 몰래 전전긍긍 보면서요.



초경 첫날 저는 친구 집에 있었어요. 물론 당황했고 친구도 같이 어쩔 줄 몰라 했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나요. 그만큼 무지했는데 엄마에게 우물쭈물하며 무언가 잘못한 사람처럼 말했던 것 같아요. 요즘에는 초경 축하파티도 한다고 하죠? 많이 달라진 풍경이죠. 이제 10대에 이른 제 아이들에게도 2차 성징이 시작될 텐데 아이들이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 변화를 바라보는 저는 어떨지, 사실 상상이 잘 안 가요. 저는 아들과 성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엄마가 될 수 있을까요? 그동안 아들의 성에 관해서는 아빠의 영역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아들들과 목욕탕에 더 이상 갈 수 없듯이 그건 남자들의 영역이라고요.



1972_pool with two figures.jpg 예술가의 초상(두 인물이 있는 풀장, 1972) 데이비드 호크니. 작품 속 빨간재킷 남자는 호크니의 11살 동성애인 피터 슐레진저.


저는 당연하다고 여기는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구분을 『젠더 트러블』을 쓴 주디스 버틀러가 본다면 다르게 말할 것 같아요. 철학자이자 퀴어 이론가 버틀러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에 저항하며 생물학적 성인 섹스도 젠더와 마찬가지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고 보니까요. 태어날 때부터 남성의 기준에도 여성의 기준에도 들지 않는 선천적 인터섹스나 과학적 정설로 되어 있는 남성만의 Y염색체가 여성에게도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근거로 제시하고요. 『젠더 트러블』이 1990년에 나왔으니까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여전히 낯설게 들리기도 해요. 인식을 바꾸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인식 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건 직시겠죠. 엄연한 존재를 정확히 바라보는 것이요.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을 통해 기존의 페미니즘 이론을 전복시키고자 해요. 기존 인식에 ‘트러블’을 일으키는 것이지요. 보부아르의 그 유명한 말에도 칼을 대면서요.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보부아르의 주장에는 여성도 적절한 교육과 학습을 통해 보편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의 이상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가 들어 있는데요, 보편적 인간을 이성을 가진 남성으로 가정하고 있어서 버틀러가 비판하고 있어요.



‘우리는 이런 분석의 틀에 전제된 남녀의 위계적 이분법과 이성애적 사랑의 구조를 문제 삼아야 한다.’ 버틀러는 페미니즘의 전제가 되는 이성애 주의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트러블을 일으키고 있어요. 버틀러가 동성애자라서 자신의 관점을 반영하기 위한 투쟁으로 보이기도 하고요.



여성다움, 남성다움은 무엇일까요? 이성 간의 사랑과 동성 간의 사랑, 무엇을 정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젠더 트러블』을 읽으면서 저에게 묻는 질문이었어요. 제가 정상이라고 믿는 것이 사실은 얼마나 편협한지도요. 저는 며칠 전에 시댁 제사 준비를 하러 다녀왔어요. 한낮의 여름날, 기름 가득한 팬에 고기전을 부쳤지요. 정상적인 며느리 역할을 하기 위해서요. 며느리에게는 두 아들이 있고 이제 아이들이 커서 살아갈 세상은 정상이라고 받아들였던 며느리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런 아이들을 저는 어떻게 키워야 할까요? 혼재된 가치들 속에서 무엇을 정상으로 여기며 살아가야 할까, 생각하면 아득해 져요.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다면 ‘트러블’은 불가피하지 않을까해요. 기존의 체계가 만들어낸 정상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새롭게 바라보기 위해서요. 그러니까 저는 정상성에 반하는 트러블이 아니라 정상적인 ‘트러블’이라고 보고 싶어요. 우리 삶에 균열은 불가피하며 그 균열에서 비로소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다고요. ‘트러블’은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탄생을 위한 ‘트러블’이겠지요. 편지를 쓰면서 이미 ‘트러블’이 시작된지도 모르겠습니다.




트러블이 더이상 트러블이 아니기를 바라며,

민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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