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는 참으로 절묘합니다. 더위가 가시고 신선한 가을이 온다는 처서가 지나고 나니 공기의 결이 바뀐 것 같아요. 시간은 정직하게 흐르고 계절은 부지런히 바뀌고 있어요. 요즘은 느닷없이 비가 내리고 또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 금방 그치는 현상이 자주 나타나는 것 같아요. 그만큼 구름도 변화무쌍합니다. 구름 보는 재미가 있어요. 구름은 한 번도 같은 모습인 적이 없거든요. 구름만큼이나 제 기분도 얼마나 오락가락한 지 이렇게 기분이 날씨에 취약하다고 느끼는 요즘입니다. 여름과 가을 사이, 여름의 끝, 가을의 입구에 서 있는 지금, 헤븐 님에게 편지를 씁니다. (제 마음대로 오가는 호칭을 이해해주실 수 있을까요.)
스스로 만든 미궁 속에 계시다고 하셨죠. ‘미궁’이라는 말이 평소보다 솔깃하게 들렸는데 요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으면서 미궁의 어원을 알게 되었거든요. 고대 그리스 남쪽에 있던 섬나라 크레타 왕 마노스가 미궁을 하나 만들 것을 명했다고 하죠. 손재주 좋은 아테네 사람 다이달로스는 왕의 명령을 받아 ‘미궁’을 만들어요. 미궁은 사람이 들어갈 수는 있되 그 안의 길이 하도 꼬불꼬불해서 나올 수 없는 감옥이지요. 그러니까 탈출할 수 없는 미궁이라는 감옥은 곧 죽음과 다를 바 없겠고요. 헤븐님과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해 나눌수록 저 역시 더 깊은 미궁 속으로 빠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는 미궁 속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기 위해 용감하게 미궁으로 들어가지요. 테세우스에게 첫눈에 반한 공주 아리아드네는 그가 죽음에 뛰어드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어 테세우스에게 미궁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실타래를 주고요. 어쩌면 사랑이라는 미궁 속에 갇힌 지금, 아리아드네의 실타래가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헤븐님의 물음이 실타래가 될 수 있을까요? ‘나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며 살고 있는지. 얼마나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주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를 넘겨받은 기분입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한번 차근차근 풀어볼게요.
먼저 나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며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 그리스 신화에서 나 자신을 몹시 사랑했던 인물이 나오죠. 그 이름은 나르키소스. 한낮에 사냥하다가 지친 나르키소스는 숲 속에 맑은 물이 고인 샘으로 쉬러 와요. 샘물에 비친 아름다운 영상에 그만 넋을 잃고 말지요. 물에 비친 그림자가 자신인지도 모른 채 나르키소스는 그렇게 자기 자신을 갈망하며 물이 그려낸 영상, 환상에 거침없이 빠져들어요. 아무리 손 내밀어도 닿을 수 없는 사랑이었던 것이지요. 사무치는 그리움에 괴로워하다 결국 죽음으로 귀결되는 나르키소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나르키소스 신화에서 나온 나르시시즘과 자기애는 얼마나 다를까요. 나르키소스가 자신과 물에 비친 환영을 구분할 줄 알았다면, 자기 자신과 타인을 구별할 수 있었다면, 죽음이라는 비극은 없었겠지요. ‘우리가 마주 잡았던 손도 결국은 내가 내 손을 잡은 것’이라고 쓴 시인이 있어요.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서 막상 사랑한 것은 상대에게 비친 나의 그림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슬퍼져요.
사랑이라는 미궁. 미궁이 곧 인간에게 헤어 나올 수 없는 장소인 죽음이라면 사랑은 죽음이라는 결론에 도달해요.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에 나오는 문장인데요. ‘사랑은 죽음, 즉 자아의 포기를 전제하기에 절대적이다. “사랑의 진정한 본질”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포기하고, 다른 자아 속에서 스스로를 잊어버린다는 점”에 있다.’라는 헤겔의 말을 인용하고 있어요. 이 문장을 곱씹어보면 나를 사랑하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완전한 모순 같아요. 나를 완전히 죽여서야 사랑의 진정한 본질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테니까요.
헤븐님은 죽음을 가까이 느껴본 적이 있나요?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아이를 낳으러 수술실에 가는 순간 아이를 곧 만난다는 기쁨보다는 죽음을 더 가까이 느꼈어요. 제왕절개를 하기 전에 이런저런 경고와 주의를 담은 안내사항에 사인해야 했고요. 가령 전신마취 후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거나 한동안 숨쉬기가 어려울 수 있다는 안내는 비록 희박한 가능성일지라도 당사자에게 알려 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사항이었지요. 비장하게 말하면 죽음을 각오하는 출산이었어요. 첫 출산은 그렇게 무서움과 두려움으로 기억되고 있네요. 생각해 보면 과거에는 출산하다가 죽는 경우가 흔했다고 하죠. 삶과 죽음이 가장 가까이 교차하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사랑은 죽음'이라는 말을 하다가 출산 이야기를 하고 말았네요. 아마도 아이를 낳는 엄마는 아이를 사랑해서 죽음을 각오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감수하고 만난 아이이기 때문에 단순히 사랑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생기는 것 같아요. 자아의 죽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출산의 경험이 예전의 나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야 하기 때문에요. 완전한 자아 파괴에 이르러야 나 자신에서 엄마로 성공적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엄마로서 아이를 완전히 사랑하는 일은 나를 먼저 버려야 가능한지, 저 자신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저는 오늘도 엄마로 사는 일에 허둥대고 있습니다.
영화 라라 랜드가 떠올랐어요. 서로의 꿈을 응원하고 사랑하는 미아와 세바스찬. 그들은 꿈을 향한 뜨거운 열정, ‘심장의 쿵쾅거림’을 노래하죠. 열정을 공유하는 연인의 모습 또한 아름답고요. 꿈에 조금씩 가까이 갈 때마다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고 지지해 주며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힘이 되어줍니다. 자신을 믿지 못할 때조차 그들은 서로를 믿어주었어요. 미아는 마지막 오디션을 세바스찬의 격려 덕분에 보게 되고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되죠. 기회를 잡으면 세바스찬과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 해지고요. 세바스찬이 말하죠. 그냥 흘러가는 대로 해보자.
그런데 사랑은 그냥 흘러가는 대로 가면 지킬 수가 없어요. 미아와 세바스찬의 꿈은 그들의 정체성이었고 그들 자신이었어요. 서로가 가진 열정이 그들을 사랑하게 만들었고 그 열정이 그들을 살아가게 하니까요. 그 열정과 꿈은 결국 자신에 대한 사랑 아닐까요. 미아와 세바스찬은 서로의 꿈을 지켜주는 쪽을 택하죠. 왜냐하면 그 꿈이 서로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들은 서로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에로스의 종말』은 '우리 안에서 사랑이 죽음과 같지 않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라고 말해요. 이때 죽음은 무엇보다도 자아의 죽음을 의미하고요. 나르시시즘적인 자아의 정체성이 흘러넘친다면 그러한 세계는 곧 '에로스의 종말'로 귀결되겠지요. 사랑은 무언가를 요구해요. 자아의 죽음을.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에는 제 안에 너무 많은 제 자신을 품고 있는 게 아닐까 싶네요.
미궁을 탈출하기 위한 실타래를 찾고 싶은
민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