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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렌 Apr 17. 2021

나의 오늘이 조금은 희망차길 바란다.

너에게는 위로를, 나에게는 상처를.

사람의 말은 참으로 간사하다고 생각한다. 뭐든지 다 내뱉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모든 말이 필터링을 거치고 나오는 것 또한 아니다.


그럴듯하게 네게 말을 하지만 스스로가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내뱉기도 한다.

그것이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를 비난하는 것인지는 나 조차도 모르겠지만.



20대 초반에서 중반으로 넘어가는 나이가 다가왔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사회에 막 발돋움한 채로 치열하게 살아왔음을 안다.


사회는 너무 드넓었고, 새로움을 알려주었지만 그 새로움 안에 오롯이 밝은 내용만이 들어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지켜본 너는 너무도 빠르게 지쳐버렸다.


어릴 적 해맑게 웃던 네가 어느 날부터인가 밤마다 눈물 흘리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인턴직으로 다니던 회사에 막근하던 날도, 유치원의 임시교사로  아이들과 헤어지던 날도. 너는 우울함에 빠져 슬피 울던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였을까.


네가 원치 않던 마지막을 보내야 해서였을까.


너는 어느샌가부터 새로운 시작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네가 우울감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뜨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나는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야 했다.


당장의 위로의 말을 해주어야 할지, 아니면 당장이라도 너에게 달려가 미련하다며 탓해야 할지. 당시의 나는 어떤 행동을 해야 너를 자극하지 않을지 한참을 고민했다.



실은,


나 또한 너와 같은 생각을 매일같이 하고 있았다.


밤에 잠도 못 이루고 세상에 태어난 게 죄라도 된 것마냥 다른 이들에게 피해 주지 않고 하루빨리 죽는 게 당시의 소원이었다는 걸 너는 모를거다.


나에게 죽는다는 표현은 그리 멀리 있는 허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놀랐던 건 네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안타까워서였다.


어릴 때부터 공부도 잘했고, 나와는 다르게 바르고 참하게 컸던 네가 어째서 그런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어릴 적의 나는 너를 보며 남모르게 부러움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런 네가 절벽 끝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그저 삶이란 이렇게 허망한 것인가를 생각했다.



그래서였을까.


어릴 때 우울증으로 상담받던 것을 고대로 너에게 말해주었던 까닭은 나의 사사로운 감정을 채우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죽는 것보다 네가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고, 취업에 대한 도전이 두렵다는 건 아직 네가 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못 찾은 것뿐이라고.


걱정하지 말고, 하고 싶은걸 하라고, 스스로를 더 사랑하라고. 너를 좀 더 아끼고 더 많이 사랑하라고.


그런 위선을 앞세워 너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런 말을 네게 해주면서 나는 자학을 했다.


허울뿐인 말을 건네는 내가 위로할 자격이 있을까.


죽는 것보다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은 내 진심을 앞세워 말한 거지만, 정작 본인에게는 매몰차서 하루빨리 죽는 게 낫지 않나 싶었다.


죽고 싶은 내가 죽고 싶은 네게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은 모순일 뿐이라는 것을 스스로가 잘 알았다.


나도 나를 아끼지 못하는데 네게 너를 아끼면 좋겠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너를 더 아끼고 사랑하라는 말을 하면서도 나는 단 한 번도 나를 사랑한 적이 없기에.


너에게 위로를 건네면서도 나는 내가 내뱉은 말에 상처를 받았다.



내 삶이 무미건조하니까 네게 하는 위로도 와 닿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너도 나처럼 스스로를 숨기려 드는 건지.


너는 그저 "고마워. 밥은 먹었어?"라는 말을 끝으로 대화의 주제를 바꾸었다.



어색한 정적이 흐르고 대화를 흐지부지 마무리하면서 끝내 위로받지 못한 너와 상처 받은 나의 오지랖만이 남아있음을 깨달았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 나는 너 하나 위로해줄 수없다는 무력감에 고개를 숙였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다정한 말 한마디를 들어보지 못한 내가 어떻게 남을 위로하고 끌어안아줄 수가 있을까.


가시를 두르고 그들을 피하던 것이 그들에게 나의 상처를 덜어주지 않으려 함이 아니라 낯선 것에 대한 방어기제로 나 살자고 하는 짓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스스로는 괜찮다고 남을 내쳐놓고 다른 사람에게 손 내미는 것이 이렇게나 힘들 줄 알았더라면 나는 뻗어 온 손들을 가만히 붙잡았을 것이다.



뒤늦은 후회는 모순으로 일관된 나를 부서지게 만들었다.


오롯이 나인 줄 알았던 것에 금이 가서 더 이상 나라는 존재가 아니게 되어버렸다.


남아있는 것은 과거의 허물이었고, 조각난 나는 내게 상처만을 남겼다.



공허함이 나를 덮쳐 한동안 또 다른 우울에 몸을 빠뜨려야만 했다.




허나, 그럼에도 나는 아직 살아있다.


아직까지도 삶에 대한 애착은 없으나 더 이상 죽는 것에 대한 미련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공허한 삶을 살아가고 그런 삶은 익숙해져 가고, 그 익숙함의 끝엔 결국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모순과 허울을 벗어던지니 남은 것은 자유였다.


사는 것에 지친 내가 살아가는데 바라는 것이 생기게 되었다.


큰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단순히 읽고 싶은 책을 살 수 있기를, 점심은 맛있는 게 나오기를, 오늘 하루도 무난하게 보내기를. 이런 소소한 것들을 바라게 되었다.



그런 작은 것이 하나 둘 모이더니 기쁨이 되더라.


소중한 것을 만들고 그것들을 지키고자 하는 바람도 생겼다.


그런 작은 것들이 모여서 삶에 대한 애착이 생기기 시작했다.


오늘은 더 좋은 일이 생기기를, 오늘은 더 예쁜 하늘을 보기를, 오늘은 더 많은 사람을 만나기를.


그런 사소한 것들이 나를 가득 채웠다.



아직도 스스로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허나, 살아갈 오늘이 좀 더 행복하기를 바랄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행복들이 점점 늘어 하루가 일주일이 되고, 일주일이 한 달이, 한 달이 일 년이 되리라는 것은 예정된 사실일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담벼락에서 아기 고양이를 마주쳤다. 길을 가다 예쁜 장미꽃도 보았다. 하늘은 맑았고, 공기는 상쾌했다.


오늘 하루를 무사히 넘겼음에 감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일의 오늘이 더 희망찰 것이라는 믿음도 가지고 있다.



삶을 살아가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위로와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에게도, 나의 오랜 친구에게도, 길을 는 아저씨도, 앞으로 자라 갈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 일터다.



하지만 너를 포함해 내일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내일의 두려움보다 오늘의 행복을 생각하라고. 스스로가 살고 있는 오늘은 어떤 하루였냐고. 우울한 당신이 오늘만이라도 행복하길 바란다고. 그리고 내일의 오늘도 행복함에 매달려 살아달라고.



나는 여전히 살아있다.


여러 번의 우울이 찾아와도 오늘을 행복하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니 부디, 네가  하루만이라도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내일이 와도, 모레가 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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