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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 Sep 22. 2020

아메리칸 드림, 드림 하우스

더듬거리는 영어로 입국 심사를 마치고, 수상하고도 묵직한 이민가방 두 포대를 겨우 카트에 얹어 나온 입국장에는 엄마의 대학 동창, 은희 아줌마가 기다리고 계셨다. 세련된 옷차림을 한 아줌마는 내 무거운 짐짝들을 트렁크가 널찍한 밴에 어렵지 않게 싣고, 능숙한 솜씨로 차를 운전해 빠르게 뉴욕 시내를 빠져나갔다.

뻥 뚫린 한낮의 고속도로. Northern Blavard라고 쓰여진 녹색 이정표을 지나, 우리는 몇 해 전 이사한 아줌마의 새 집이 있는 롱 아일랜드로 향했다.

십 년 전 여름 엄마와 우리 남매가 뉴욕에 처음 놀러갔을 때 아줌마, 아저씨, 딸 셋. 다섯 식구였던 아줌마의 집은 퀸즈 플러싱에 있었다. 주방 옆으로 계단이 있고, 지하실이 딸린 이층 집이었다. 그 지하실에 쌓여 있던 만화책들을 실컷 꺼내 읽던 기억이 난다.

어느새 차는 고속도로를 빠져 나와, 집에 가까워지며 동네가 눈에 들어왔다. 집집마다 잘 가꿔진 푸른 잔디가 눈에 띄었고 적당한 간격을 두고 이어지는, 햇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던 흰색의 목조 주택들은 동화책에서나 보았던 마을을 연상하게 했다.

Meadow Woods road, Lake Success village, Great Neck. 아줌마의 집 주소였다. 마을 이름처럼, 이런 곳에 집을 가지고 있다면 분명 꽤 성공한 인생인 듯했다. 그 사이 아줌마는 예쁜 딸을 하나 더 낳았다. 식구가 많은 집이니 이번에도 지하실에서 신세를 질 생각이었지만, 나는 세면대가 두 개나 있는 전용 화장실이 딸려 있고 셋이서도 잘 수 있을 것 같은 큰 침대가 있는 손님방에서 이 주를 묵었다.

처음 며칠은 시차 적응을 핑계삼아 자는 척 방 안에만 머물렀다. 물기 하나 없이 반짝거리는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고 나서는 생전 처음 보는 커다란 목욕 타월로 떨어진 물기를 닦고 집에서는 신경도 쓰지 않던 빠진 머리카락을 쪼그려 줍기도 했다.

아침 일찍 맨해튼의 건강식품 가게로 출근하시는 아저씨, 대학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큰 언니와, 아직 고등학생이었던 동생들, 그리고 초등학생인 막내까지 등교를 마치고 나면 고요해진 집 안에는 아줌마와 나, 둘 뿐이었다. 조금은 긴장된, 평화로운 며칠이 지나고, 나를 조용히 내버려두었던 아줌마는 십 년만에 돌아온 친구의 딸에게 베푸려던 친절을 겨우 참으셨다는 듯, 성대하게 차려진 둘만의 아침 식사에 나를 호출하기 시작하셨다.

그전까지는 달달한 커피나 몇 번 얻어 마셔보았을 뿐인, 스무 살이었다. 향긋한 원두를 직접 내려 주시는 아줌마의 정성에 화답하기 위해 설탕도 프림도 없이 쓰디쓴 커피를 벌컥벌컥 비워내고 나면 아줌마는 기다렸다는 듯 잔 가득 커피를 채워 주시곤 했다. 졸지에 커피 애호가가 된 나는, 집을 떠나는 날까지 커피 맛은 여전히 잘 몰랐으나 쓴 커피에 자연스럽게 우유를 부어 마시는 노하우만큼은 익히게 되었다.

그렇게 아침마다 꼬박  커피를 마시며 나는 아줌마의 말벗이 되었다. 내게 인상 깊은 친절을 베풀기 위해 아줌마도 애를 쓰셨던 셈이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실제로 그럭 저럭, 썩 나쁘지 않은 말동무가 되어 드렸다고 나는 생각한다.

음대를 졸업한 뒤, 학업에 욕심이 있었던 아줌마는 미국으로 유학을 왔다. 뜨겁게 연애중이었던 아저씨는 공군 사관 생도로, 임관 후에도 군에 남아 일했다. 공부를 마친 후, 지금의 식품 가게를 열고 먼저 미국 땅에 터를 잡은 것은 아줌마였다. 엘리트 군인의 길을 걷고 있었던 아저씨마저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사랑을 택해 미국으로 오면서 아름답고, 멋졌던, 사진 속의 두 선남 선녀는 문자 그대로 예쁜 네 딸을 둔, 화목하고 다복한 지금의 가정을 꾸렸다.


2005년, 십 년 전의 호황과 달리 미국의 내수 경제는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고 나의 '방미'에 아줌마의 살림이 힘들어질까봐 엄마는 한 걱정을 했지만 뭣모르던 내가 느낄 수 있었던 건 난생 처음 누려보는 교외지의 낭만 뿐이었다. 이층 집, 수영장, 바비큐, 내게도 워너비였던 큰언니의 미니 쿠퍼를 포함한 석 대의 자동차. 가계는 여전히 몇 년간 이어져 온 풍족한 생활을 지탱하고 있는 듯 보였고 학군이 뛰어난 동네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아이들은 주변 이웃들의 부러움을 샀으며 그것이 여섯 식구의 살림을 하고, 틈틈히 가게일을 돕고, 어린 막내를 돌보는 일이 쉽지 않으셨을 아줌마의 동력이자 위로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침 나절 내내 이어지는 자식 자랑 쯤이야. 내가 진 신세에 비하면 종일이라도 들어드릴 수 있었다. 심지어 꽤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아줌마와의 독대가 스스럼없이 편해졌을 즈음, 어느새 예정되어 있던 두 주가 흘렀고 미국에서 맞는 열 네번째 밤. 첫 날 지나온 고속도로를 거꾸로 달려 맨해튼으로 들어갔다. 아저씨가 운전해주시는 차의 뒷자리에서, 멀리 빛나는 윌리엄스버그 브릿지를 바라보며 비로소 이 도시에 도착했다는 실감과 함께, 설렘과 떨림이 뒤섞인 감정에 휩싸였다. 마지막까지 엄마 아빠처럼 배웅해 주신 아줌마, 아저씨와 작별을 하고 롱아일랜드의 포근한 손님방이 벌써 그리워지는, 어둡고, 낯선, 쾌적함과는 거리가 있는 구세군 여성 기숙사로 짐을 옮겼다.


시간은 흐르고, 낯선 기숙사에서의 긴 밤도 지나가기 마련이다. 긴 하루, 그보다는 짧은 하루가 이어졌다. 와이파이 하나 설치하는 데에도 영어를 못해 애를 먹던 첫 달도 지나갔다. 젊음은 좁은 방에도, 삭막한 도시 생활에도 빠르게 적응해 갔고 서울에 두고 온 엄마에게도, 롱 아일랜드에 두고 온 은희 아줌마에게도, 뉴욕 49번가에만 들러도 만날 수 있었던 아저씨에게도 안부 한 번 전하지 않은 채 바쁜 일 하나 없어도 바쁜 척하는 게 일과인 청춘의 날들이 흘러갔다.

그때는 그랬다. 하지 말라고 말리는 사람도, 하지 못할 일도 없었다. 모든 게 흐릿했다. 맨해튼에서 보낸 일 년은 롱아일랜드에서의 이 주보다 금방 지나 버렸고 나는 제대로 된 작별 인사도 없이 한국으로 돌아와 여전히 흐릿한 청춘을 살아가기 바빴다.


2008년,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미국 전역을 휩쓸었다. 위태롭게 버텨오던 아줌마의 가계도, 붕괴해 버린 주택시장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가계가 파산해도 집을 팔아 손실을 막을 수 있다던 금융 시장의 논리도 파기됐다. '서브' 프라임이라는 말처럼,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계층에게도 대출을 허용한 탓이다. 높은 금리로 말이다.

누구의 잘못이었을까? 아시아계 미국인과 유학생들로 북적거리는 플러싱을 떠나, 넓은 정원이 있고, 부유한 유대계 미국인을 이웃으로 두는, 훌륭한 학군지에서 아이들을 잘 키워 보려던 아줌마의 꿈을 비난할 수 있을까? 빚을 내어 내 집을 장만하는 것이 '노멀'이었던 세상에서 말이다.

미국 정부는 파산 직전인 금융계에게는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아줌마와 같이 삶의 터전이자 그들의 모든 것인 '집'을 빼앗기기 직전인 사람들에게는 대출 금리를 내려 주지 않은 모양이다. 아줌마가, 그렇게 사랑했던 집을 잃고, 맨 몸으로 일구어 낸 가게마저도 힘없이 비워주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 몇 해 전이다. 미국 경제가 나아지고 있다는데, 부디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으셨기를 바랄 뿐.


한 가지 다행인 사실이라면, 아줌마에게는 특별함이 있다. 아줌마에게는 평생을 의지해 온 신앙이 있었고, 특유의 긍정과 강인한 생활력도 있었다. 나는 아줌마가 가진 그 힘이, 개인의 삶들을 집어삼킨 그 소용돌이 속에서 아줌마를 지켜내었으리라고 믿고 있다.


결혼식을 올리던 해 아줌마는 그 먼 곳에서 우편으로 선물을 보내 주셨다. 아줌마의 고급스러운 취향이 드러나는 향수 한 병과 좋은 향이 나는 아로마 향초, 하나님의 축복이 너의 가정에 깃드리라는, 힘 있고 정갈한 글씨로 쓰여진 카드도 함께였다. 아줌마다운, 우아하고 완벽한 결혼 선물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 초를 피워보지 못했다. 그 시절 아줌마와 아침 식사를 함께할 때 나는 이미 성인이었지 않은가. 엄마를 통해서가 아니라, 아줌마에게 직접 감사 인사를 전해야 했었다. 전하지 못하고 유효기간을 지난 마음들이, 빚이 되어 쌓여 있다. 그 빚을 갚는 날에는 향이 좋은 향초를 피울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문득 아줌마와 함께했던 길고 지루한 아침 식사가 그립다. 주일 아침이면 아저씨가 사다 주시던 따끈한 팬케이크의 맛도 생생하다. 몸뚱이만 성인이었을 뿐, 커피조차 입에 썼던 어린 날이었다. 뉴욕에서 지내며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만, 돌아보면 그 때의 나는 여전히 보호자가 되어 줄 어른이 필요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줌마, 아저씨, 언니, 동생들, 이제는 성인이 되었을 막내까지, 모두 평안하고 행복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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