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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 Sep 22. 2020

나의 첫 번째 셰어하우스

2005년 겨울, 구세군 기숙사에서 만난 언니들과 퀸즈의 투 베드룸을 얻어 이사를 했다. 오래된 기억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한 달 월세가 천 백 달러 정도였다. 한 사람 앞에 구백 달러나 하던 시내 기숙사에 비하면 무려 오백 달러 이상을 절약하는 일이었고, 어차피 부모님이 부쳐 주시는 돈으로 생활하는 것이었으면서도 그 돈을 아낀다는 것에 대단히 어른스럽고도 기특한 일을 하는 양 고무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그 나이까지 한 번도 집을 떠나 생활해 본 적이 없었으므로 자취생활에 대해 망상에 가까운 로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소셜 넘버가 없는 우리에게 렌트를 넘기고 간 전 주인은 유학생으로 미국에 왔던 젊은 부부였다. 갓 태어난 아기도 있었던 기억이 난다. 멀지 않은 곳에 집을 사서 간다고 했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집을 옮기는 이유가 있으리라고는 의심도 하지 않았다.

다세대 주택 이 층의 한 호실이었던 집은 거실도, 주방도, 방도 꽤 큼직하니 넓어 보였다. 붙박이 장도 있어 수납 걱정도 없어 보였다. 새로 바꿀 예정이라 전자렌지도, 사용하던 원형 식탁도 두고 가겠다는 부부의 말에 싸구려 호텔방 같던 기숙사 2인실에 신물이 나 있던 룸메이트 둘째 언니와 나는 더욱 신이 났다.

둘째 언니는 나보다 세 살이 많은 스물 셋, (띠동갑이라는 사실이 첫 만남에 서로를 뜨악하게 했던) 큰 언니는 서른 둘이던 해였다. 둘째 언니는 대학을 그만두고, 큰 언니는 잘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꿈을 펼치기 위해서, 내지는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돌아보지 않을 각오로 뉴욕에 온 것이었다. 돌아갈 오픈 티켓을 끊고 온 건 나 뿐이었다.

큰 언니는 사회 생활을 하며 모아둔 돈과 퇴직금으로, 계획했던 학업을 마치고 다시 직장을 구할 수 있을 때까지, 다시 말해 언제까지 지출이 이어질 지 알 수 없는 시간을 버텨야 했고 둘째 언니는 생활비를 송금받고 있었지만, 외벌이에, 군인이셨던 아버지가 막 퇴역하신 직후였기에 넉넉한 지원은 아닌 것 같았다. (언니는 이후 해외 구매대행의 선구자가 되어 자력으로, 여유 있는 생활을 하게 된다.)

나도, 당찬 각오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요즘 제 2의 전성기를 맞은 '비'도 미국에 오면 자주 들른다는 고급 한식당에서 어설픈 정장을 갖춰 입고 손님을 받는 일이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나에게 돈벌이는 알량한 직업 체험에 지나지 않았다. 매니저에게 혼이 나고, 마침 주급을 받은 날이었고, 돈을 모아 등록하려 했던 학교에 보내 주겠다는 부모님의 연락을 받고는 그만 두어 버렸으니까.

생각해 보면 둘째 언니와 내가 퀸즈의 집을 둘러보고 벅찬 기분으로 큰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언니는 이상하게도 그리 신이 나 보이질 않았다. 미적지근한 언니의 반응에 당시 우리는 무척 서운했었다. 매섭게 추운 날이었다. 우리가 발품을 팔고 고생한 일을 같이 와 보지도 않고 트집만 잡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보면 우리는 애송이였고, 언니는 그때도 이미 뭘 좀 아는 어른이었던 것이다. 생활비를 절약하고, 넓은 방으로 이사하는 댓가로 맨해튼 중심부에서, 교통 수단이라고는 걸핏하면 운행이 늦어지고 끊기는 메트로 한 호선뿐인 변두리에 사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저렴한 렌트비에 걸맞는 집은 분명 하자가 많은 집이리라는 것을.


2006년 2월. 육십 년만의 폭설이 내린 해였다. 그 해 겨울 나는 그토록 소원이었던 영화 아카데미의 첫 학기를 시작했다. 시내에 가야지만 지하로 진입하는 7번 트레인은 숱하게 눈이 오던 그 겨울 내내 지긋지긋하게 멈춰 섰다. 매일 아침 남쪽 끝인 소호의 캠퍼스까지 아홉시까지 도착하는 것에서부터 진이 빠졌다. 아홉 시부터 다섯 시까지 꽉 채워 수업을 듣고 새벽에도 시내로 촬영을 나가야 하는 일정이 계속되었고 어느 날엔가는 수업시간에 졸다가 앉아있던 의자에서 쿵 떨어졌다. 나라 망신은 다 시켰다.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오면 밥도 먹기 싫고 잠만 자고 싶었지만 혼자 하는 생활이 아니었기에 숟가락도 놓아야 하고 식사 준비도 도와야 했다. 기숙사에서는 시간만 잘 맞춰 가면 아침도, 저녁밥도 먹여 주었다. 그 방에는 식탁도 부엌도 없었지만, 그렇기에 설거지를 안 해도 된다는 걸 왜 몰랐을까. 주말이면 내 빨래에 가끔은 언니들의 빨래를 얹어서 몇 블록을 걸어 빨래방에 갔다. 빨래가 다 되면 건조기에 넣기 위해 멍하니 자리를 지키고 앉아, 나는 정말이지 엄마가 보고 싶은 어린아이의 마음이 되고는 했다.


따뜻한 봄이 오자 겨울 내내 황량하기 그지없던 동네에 사람들이 걸어다니기 시작하고 구경거리라고는 하나 없는 거리라도 인파가 불어넣는 활력이 도는 듯 했다. 아침 등교 시간을 맞추기 위해 화장도 그만 두고 머리도 짧게 깎아버린 나는 학교 생활에도, 루즈벨트 애비뉴의 긴 환승 구간에서 맡아야 하는 인종이 뒤섞인 체취에도 그럭저럭, 적응해가고 있었다.


여름이 왔다. 나무로 지은 목조 다세대 주택은 건물 주인도, 세입자 대부분도 중국인이었다. 대 가족이 사는 일층 세대에는 분리수거도 하지 않고 내놓는 쓰레기들이 쌓여갔다. 어느 오후, 온 집안을 유유히 날아, 붙박이장의 옷 위를 기어 다니다가, 두꺼운 잡지책을 맞고서야 사망한 거대한 미국 바퀴 한 마리가 등장한 그 날 이후로 미국 코미디 영화에서나 보았을 법한 바퀴떼의 본격적인 습격이 시작되었다.

눈도 못 뜬 아침부터 화장실 문에 붙어 있는, 아침 인사라도 나누자는 듯 까꿍 놀래키는 바퀴를 만나는 일도 다반사였고 설거지를 하다 털 끝이 바짝 서는 느낌에 발을 내려다 보면 그건 싱크대와 발 끝 사이 한 뼘짜리 틈으로 녀석이 지나는 기척이었다. 벌레들은 하루 평균 서너 번, 온 집안의 모든 구석에서 당당하게 나타났고 이 나라의 종자는 공중 비행이 꽤 오래 가능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벌레라면 정말 기절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둘째 언니 때문에 외출을 했다가ㅡ침대 밑에서 나온ㅡ죽은 바퀴벌레를 치우러 다시 돌아가는 날도 있었다. (언니는 내가 도착할 때까지 높은 의자에 올라가 내려오지 못한 채였다.)


삶이 퍽퍽해질수록 나는 내 발로 따라나온 언니들을 원망했고 여전히 의뭉스럽고 무심한 것 같은 큰 언니와는 오해만 깊어갔다. 우리는 가끔은 다투고 싸웠다. 우리는 지나치게 가족 같았다. 모든 처음이 그러하듯, 서툴고 상처 뿐인 첫사랑처럼 우리는 너무 가까워진 나머지 어느 날부터 거리를 두고 지내는 사이는 될 수 없었다.

지혜롭고 신중했던 큰 언니가 아버지, 수에 밝아 꼼꼼하게 집안 살림을 챙겼던 둘째 언니는 어머니, 나는 나이가 어리고 할 줄 아는 것도 없어 베이비. 남이었던 우리는 서로를 가족과 비슷한 호칭으로 불렀다. 이상한 가족이었다. 그리고 그 해 여름, 우리는 도망치듯 그 집을 나왔다.


뉴욕 생활이 몇 달 남지 않았던 나에게 주어진 선물처럼 유니온 스퀘어 한복판의 고층 맨션ㅡ원 베드도 아닌 스튜디오였지만ㅡ을 한 달 보름 정도 되는 기간 동안 아주 저렴하게 빌려 생활할 수 있었다. 도어맨이 상시 문을 열어주고, 세탁실과 짐, 야외 테라스, 원스톱으로 이동할 수 있는 지하의 대형 식료품점까지 갖춘 주상복합 맨션에 우리는 낡아 빠진 살림들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이사를 했다.


남은 여름은 아무도 누구를 미워하지 않았다. 어느덧 우리들은 시간이 흘러도 평범해지지 않을, 특별한 인연이 되어 있었다. 함께했던 일상이 그리워질 것을 예감하며 부지런히 남은 시간을 보냈고 곧 우리는 모두에게 처음이었던 헤어짐을 맞이했다. 둘째 언니가 선물해 준 거대한 니모 인형을 안고 늦은 밤의 jfk에서 언니도 울고 나도 울고,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언니들은 맨해튼도, 퀸즈도 아닌 뉴저지에서 룸메이트를 바꿔가며 칠 년을 더 함께 살았고 그이들도 나처럼 때가 되면 방을 비우고 떠나갔다. 언니들의 쉐어 하우스는 공동 생활의 규칙을 지키며 개인으로 살아가는 공간으로 진화해 갔고 헤어짐도 처음처럼 막막하게 슬픈 이별은 아닌 것 같았다.

몇 해 전, 둘째 언니는 번창했던 구매 대행 사업을 정리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결혼을 하고 두 딸을 낳았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언니가 지금 행복하리라고 확신할 수 있다. 큰 언니는 여전히 뉴욕에 산다. 석사를 마치고 우리 영화를 북미 시장에 배급하는 일을 하고 있다. 언니는 우리 셋 중 누구보다 십 오 년전의 계획대로 삶을 살았다. 나는 미국에서 돌아온 지 반 년만에 달랑 이백 불을 바꿔 들고 언니들을 만나러 갔다. 그리운 것들은 여전히 그대로 있었고 채 두고 오지 못했던 어떤 마음을 잘 묻어 두고 온 뒤로는 더 이상은 그 시절이 그립지 않았다.


얼마 전, 뉴욕에도 코로나가 심각하다는 뉴스에 몇 년만에 큰 언니의 안부를 물었고 지난 주에는 둘째 언니로부터 아동용 덴탈마스크를 택배로 전해받았다. 동물 프린트가 유치해서 싫다는 주원이에게도 엄마의 소중한 친구, '윤희 이모'의 선물인 것을 일러 주니 그 뒤로는 잔말 않고 잘 쓰고 다닌다.

열 몇 번째의 '룸메이트'와 함께 살고 있을 큰 언니는 무수히 곁을 거쳐 간 사람들 가운데서도 '베이비'는 다른 느낌으로 남아 있어. 라고 말해 주었다.


언니도 처음이었으니까. 우리 모두 처음이었으니까요. 적당히 거리를 두고, 상처는 주지도 받지도 말고. 내 공간, 네 공간, 내 생활, 네 생활. 우리 그때 그런 걸 몰라서 힘들었지만, 그래서 나도 언니 인생에 함부로 끼어들 수 있었어요.

언니가 쓰는 침대에 허락도 없이 기어 들어갔고, 우리의 양말은 늘 뒤섞이고 바뀌어 있곤 했어요. 그렇게 우리가 서로의 인생에 멋대로 남겨둔 흔적을 평생 들여다 볼 수 있어요.

고마웠어요. 기숙사에서 쭉, 별 탈 없이 혼자서만 잘 지내다 오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에요. 세월이 흘러도 소중한 내 '가족'. 내 언니들. 어디에 있든 모두 건강히, 언제라도 다시 만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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