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같았던, 첫 번째 전셋집의 기억
결혼을 하고 칠 년 간 무려 네 번의 이사를, 다섯 번 집을 옮겨 살았다. 서울에서, 서울 밖에서, 동서남북을 오가며 살았다. 각기 다른 다섯 군데의 아파트에는 장, 단점이 분명했다. 첫 번째 집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한다. 부유하지 못한 형편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첫 전셋집을 무려 강남의 아파트에 얻었다. 강남 한복판의 대단지 아파트. 지금은 훨씬 잘 지어진 집들이 많지만, 당시만 해도 흔하지 않았던 고급스런 외관의 재건축 아파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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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그 단지를 구경하던 날 지방에서 갓 상경한 사람처럼 입이 떡 벌어지던 생각이 난다. 그리스 유적 같은 문주 앞에서. (실제로 전세 계약을 하던 날 손목에 롤렉스 시계를 번쩍이던 집주인의 아들이 남편의 경기도 주소지를 보고는 ‘어이쿠. 멀리 시골에서 오셨네요.’ 했다던 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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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이 처음이고 소심한 성격이라 더 그랬겠지만, 입주하고도 한참을 이방인 같은 느낌에 늘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슈퍼에서 장을 볼 때도 세탁을 맡길 때도 다른 사람들이 먼저 어떻게 하는지 관찰부터 하기 바빴다. 평생을 자유롭게 출입하던 아파트 현관을 카드키 없이 내려와 몇 번이나 쭈뼛대며 경비실 호출을 누르고 멋쩍게 누굴 따라 들어갔던지. 그러다 임신을 하고, 갑작스런 퇴직을 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 안에서 보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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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유행이었던, 지금은 보완이 되었거나 잘 짓지 않는 타워형 아파트로 설계된 그 집은 환기가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 맹점이었다. 주방에 달린 작은 창문은 기껏해야 공용 복도에 고인 공기만을 순환시켜 주었고 그마저도 쇠창살 같은 보안 창틀이 시야를 답답하게 가려 버렸다. 각 집이 양 옆으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구조는 단열에는 유리했지만 여름에는 너무 더웠다.
대로변에 인접한 동이어서 문을 열면 먼지가 너무 많이 들었고 새벽까지 버스가 정차하고 붕 출발하는 소리를 듣는 것도 고역이었다. 곧 관둘 줄도 모르고 직장 근처여야 한다는 이유로, 연고도 없는 강남 한복판에 무리해서 세를 얻었으므로 따지자면 가성비도 형편없었다. 어쩌면 그 무렵부터ㅡ잘 알지도 못하면서ㅡ전원생활에 대한 나의 막연한 향수가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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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별로 애착을 가지지 못하다 떠나서인지 사진도 몇 장 남아있지 않다. 그저 그 집에서 우리의 첫 출발을 했고, 첫 아이를 가지고 낳았던 공간이라는 의미를 둘 뿐이다.
편리한 점도 분명 있었다. 서울에서도 구석인 목동에서 양재동까지, 두 시간 가까이 걸렸던 나의 출퇴근이 마을버스 십여 분으로 단축되었고, 결혼 전까지의 서울 살이라고는 열악한 반지하의 원룸ㅡ그마저 동생에게 더부살이ㅡ이 전부였던 경기도 토박이 남편 역시도 버스 몇 정거장으로 뚝딱 출근이 가능한 버스세권을 잠시 누리기도 했으니.
그리고 너무 짧은 신혼이었지만 기억에 남아있는 장면 몇 개: 1) 퇴근하고 중간인 매봉역에서 만나 치맥을 한 뒤, 벚꽃 핀 양재천을 따라 집으로 걸어갔던 어느 봄날 2)주말 아침 독일 마을ㅡ그 동네는 독일차가 너무 흔해서 그렇게 불렀다ㅡ에 있는 유명 빵집에 브런치를 먹겠다며 추리닝에 눈꼽만 떼고 나갔던 날, 생생한 그날의 아침 공기. (사람이 많아서 못 먹고 빵만 사다가 집에서 차려 먹었지만, 이미 가는 길이 다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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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푸어'. 집을 사면 바보라는 말이 흔했던 시절. 금융 위기로 거품이 꺼져버린 부동산 경기도, 전세 시세도 지금처럼 터무니없지는 않았고 꽤 넉넉한 집으로 시집 가는 척, 부모님을 안심시켜 드리기 위해 무덤까지 비밀에 부칠 대출을 받아 결혼 오 년 차에 겨우 갚았을 정도였으니, 그렇게 우리에게 과했던 집이었으니.
인생에서 언제 또 양재천을 안양천처럼 산책할 수 있을까. 내 생애 몇 안 되는 사치스런 기억으로 잘 간직해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