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바람이 치던, 두 번째 전세집의 기억
2014년 가을, 인생에서 단 2년 뿐이었던 '강남구민' 생활을 마친 우리는 조용히 이삿짐을 쌌다. 강남에만 집이 몇 채라던, 요즘 말로 다주택자였던 집주인은 우리가 집을 비우는 시점에 맞추어 그 집을 매물로 내놓았다. 이미 2년 전부터 팔고 싶었으나 팔리지가 않아, 울며 겨자먹기로 우리에게 값싼 전세를 놓았던 터였다. 이번에는 어떻게든 집을 팔아보려던 주인은 시세보다도 턱없이 낮은 헐값에 가격을 정했고, 형식적인 절차로, 우리에게도 집을 살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지금 시세로 따지자면 서울은 커녕, 수도권 신축 아파트 값보다도 저렴한 가격이었다. 하지만 전세금도 겨우 마련해 들어간 당시 우리에게는 꿈도 꾸지 못할 금액이었다. 결국 그 집을 사서 나타난 건 우리보다도 더 나이 어린 신혼부부였고, 인테리어를 구상하기 위해 짐이 다 있는 집 사진을 찍어가겠다는 말에 마지못해 끄덕이면서도, 묘하게 빈정이 상하는 기분을 감출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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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 집이 무척 마음에 들었더라면 달러빚을 내어서라도 집을 샀을지 모르겠다. (아니다. 달러빚을 내었어도 불가능했다. 솔직하자.) 하지만 어쨌거나 집에 미련이 없기는 우리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한다. 빛 좋은 개살구. 다른 집에 살면서 하나 가지고 있기에는 더없이 좋은 투자처일지 몰라도, 사람이 들어가 살기에는 참으로 답답한 것이 타워형 아파트였다. 다음 살 집은 무조건, 다른 건 몰라도 반드시, 맞바람이 치는 판상형 아파트로 가자고, 초보 부부는 전세살이 2년으로 하나의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잠실로 간다는 말에, '강남'을 사랑하는 부동산 아주머니는 "그렇죠? 거기가 (여기보다) 좀 저렴하죠?" 라며, 우리가 오르는 전세값에 강남에서 쫓겨나는 난민이라도 된 양 안타까워하셨다. 그 때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사갈 집은 방도 한 칸 더 있고 바람 잘 부는 판상형이거든요? 그 집에선 오래오래 살 거거든요?'
그러나 부동산 아주머니의 예언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이후로도 전세값은 끝을 모르고 올랐고, 우리는 계속해서 서울 밖으로 밀려나기만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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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가을. 오 천 세대가 넘는 단지에ㅡ부동산 뉴스 배경에 단골로 등장하는ㅡ상가 일 층 자리는 모조리 죄다 부동산들 뿐인데도, 어째서인지, 전세는 씨가 말라 품귀 현상이라 했다. 어쩌다 매물이 나오면 그 날 안으로 계약이 되어 버리기에, 평일 대낮이라도 매물이 뜨면 집을 보러 가는 것은 퇴직한 임산부인 내 몫이었다. 그렇게 내가 둘러보고 나온 집을 퇴근 후에 남편이 한 번 더 본 뒤에, 상가 맨 꼭지에 있던 '왕' 부동산에서, 이번에도 역시 오래 따져볼 새 없이, 우리는 두 번째 전세계약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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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사라져 버린 '신천'역과 '잠실'역 사이, 주공1,2,3,4단지는 80년대의 대표적인 서민 아파트였다고 한다. 입주한 다음 날 청소를 도와주러 오신 아주머니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셨다. 당신이 예전에 이 주공 아파트에 살았더라고, 그 자리에 이렇게 빽빽하고 많은 새 집이 지어질 줄은 상상하지 못하셨다고.
그러게나 말이다. 그걸 미리 아셨다면 집을 팔지 않고 가지고 계실 수 있었을까? 미래를 그 누가 알 수 있겠는가. 2014년의 나도 몰랐다. 먼 미래도 아닌, 2년 뒤 우리의 앞날을.
전셋값이 꼭지를 찍었다고. 그 비싼 값을 치르고 들어온 집이니 이제 더 오를 일은 없으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2년 뒤, 시세는 우리가 생각했던 '최대치'라는 예상을 가볍게 비웃으며 말도 안 되는 값으로 뛰어 올랐고 그토록 찾아 헤맨 맞바람이 불던 집에서, 2년만에, 우리는 이번에도 조용히 이삿짐을 쌀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입주하는 세입자는 이번에도 갓 결혼한 신혼부부였으며, 우리가 큰 돈을 들여 발라 놓은 모던한 새 벽지를 마음에 꼭 들어했다. 뭐, 뜯어내지 않고 사용하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전세와 매매 가격은 이제 큰 차이가 없었다. 그 비싼 전세금을 마련할 수 있는 형편이라면, 조금 보태어 집을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 물론 우리는 그만큼의 전세금이 없었으니, 언감생심 매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때쯤에는 우리도 뭔가를 깨달아야 했다. '조금만 보태어' 집을 살 수 있는 가격이 되었을 때, 누군가는 그 '조금'을 가지고 집을 살 생각을 한다는 것을.
바로 그 때가 '갭 투자'의 시작이었고, 높은 전세값이 매매가를 떠받치고 있는 역세권, 소형, 신축 아파트는 투자에 안성맞춤인 물건이었다.
2015년 봄부터 2016년의 여름까지, 아이를 데리고 목동의 친정에서 생활했던 내게 잠실 집의 한강변과 2호선 역세권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밤이 깊어야 집에 들어와 잠만 자고 나가던 남편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쩌다 짐을 챙기러 들를 때면 아이는 그 아파트를 '아빠 집~' 이라고 불러 우리를 무안하게 했다. 시험이 끝난 뒤 짐을 싸서 돌아와 이사를 나가기 전까지 반 년, 고작 그 반 년이 우리가 간직하는 잠실에서의 추억 전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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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 어스름한 저녁에 우리는 세 번 정도 킥보드를 타러 오 분 거리의 한강에 나갔고, 삼 천원이면 종일 이용가능한 한강 수영장을 두 번, 주원이를 세 발 자전거에 태워, 젖은 수영복에 수건만 둘러준 채 다녀올 수 있었다.
롯데월드의 어린이용 놀이기구를 타러 한 번 들렀고, 푸트코트에서 짜장면을 먹었다. 새로 생긴 롯데 타워 지하의 아쿠아리움을 구경했고, 거기서도 짜장면을 먹었고, 열대야가 심한 밤에 석촌 호수에 걸어서 산책을 갔다가 더위만 먹고 돌아왔던 기억이 있다. 특별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삼송으로 이사한 겨울에 결혼식이 있어 들른 삼성동에서, 아이를 위해 주말의 롯데월드를 들러, 값비싼 주차료를 지불하면서, 긴 줄을 서서 빅 파이브를 겨우 채우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던 토요일의 꽉 막힌 도로를 생각하면, 아무리 덥고 추워도 도심을 걸어다닐 수 있는 거리에 살기 위해 많은 비용을 지불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용적률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재건축 아파트. 최대 34층까지 솟은 아파트의 중간 쯤인 15층이었던 우리 집은 맑은 날에도 해가 드는 때라고는 서 너 시간이 잠깐이었다. 그 잠깐의 태양빛을 누리기 위해 나는 반투명의 UV필름이 코팅되어 있는 창문을 활짝 열어두었었다. 거실에서 보이는 풍경은 앞 동의 창문 뿐. 블라인드는 늘 내려 두었고, 걸치기를 귀찮아하는 성격만큼 마음껏 옷을 벗고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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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에서 짙푸른 한강이 보이고, 멋진 야경을 감상할 수 있는, 넓고도 쾌적한 대형 평수의 아파트라 해도, 이십 억은 개인의 능력으로 쉽게 모을 수 있는 돈은 아니다. 그런데 이제는 부엌 다용도실 창문에서, 겹쳐진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 매직아이처럼 눈을 모으고 들여다 보아야 겨우 보이는 '한강' 변에 있다는 것만으로 (남편은 늘 농담처럼 우리 집도 한강뷰야. 말했고 나는 코웃음을 쳤었다.) 스물 몇 평짜리 닭장 같은 아파트가 이십 억을 호가한다고 하니. 아무리 생각해도, 숨 쉴 수 있는 풍경과 적당한 각자만의 공간을 가지는 것이 더 좋은 나는 아무래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인 것을 어쩌랴.